brunch

학교 정전 반나절 체험기

너무 당연해서 소중한 줄 모르는 것들

by 김채원

오전 7시 26분. 우리 반 단톡방 알림이 빠르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냐며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집을 나서기 직전, 교직원 단톡방에도 메시지가 왔다. 학교 주변 공사장에서 전기 관련 사고가 났고 그로 인해 학교 주변 및 학교 내 모든 전기가 나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아침부터 여러 사람이 놀랐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학교에 가까워지자 소방차 몇 대가 보였다. 학교 주변 신호등이 모두 꺼져있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정전이 조금 실감 났다.


예상대로 학교는 소란스러웠다. 불이 안 켜지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등 스위치를 누르는 아이와 복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서서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정전 사실을 알리는 아이, 선풍기가 안 켜져서 죽을 것 같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아이와 불이 안 켜지니 아무것도 안 보여서 공부를 못 하겠다며 아쉬워하는(?) 아이들로 정신이 없었다. 소란스러운 틈에도 야무진 친구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더니 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불이 안 켜져서 공부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와아아아아아아!”

아이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나는 환호 소리가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대답했다.

“전기가 안 들어오면 컴퓨터도, TV도 안 켜지고 당연히 영화도 볼 수 없어.”

“아…"

아이들은 불이 안 켜질 때 보다 컴퓨터와 TV가 안 켜진다는 말에 전기의 소중함을 더 느끼는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준비한 PPT자료와 동영상 자료 없이 수업을 해야 한다니 속이 상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도 어려움이 생겼다. 목이 마르다고 물 마시러 간 아이들이 정수기도 작동하지 않는다며 물을 못 마시고 돌아온 것이다. 정수기도 전기로 작동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다행히 얼마 전 체육대회 때 500ml 생수 몇 병이 남았던 게 생각나 급한 대로 목마른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급식실에서도 점심을 준비할 수 없다고 했다. 전기가 끊기니 당장 점심도, 마실 물도 구할 수 없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전기는 내 생명줄과도 같았다.


컴퓨터를 켤 수 없어 업무는 마비되었지만 교육활동은 이어나가야 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선생님들이 급히 대체 활동을 준비해서 수업하느라 바빴 관리자들도 예상 전기 복구 시점을 아내 그에 따른 대책을 세우느라 바빴다. 오늘따라 날씨는 푹푹 쪘고 창문을 다 열어놔도 땀이 마르지 않았다.


10시까지 복구를 목표로 작업하고 있다는 말을 믿고 버텼는데 10시 10분이 되니 11시에 복구가 될 거라 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는 마음에 기대도 안 했는데 역시나 11시 6분이 되자 30분 안에 마무리가 된다고 했다. 이대로 점심시간을 넘겨버리면 아이들 급식은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리가 아팠다.


11시 27분. 교실에 불이 들어왔다. 아이들은 일제히 자기가 있던 자리에서 손뼉을 치며 함성을 질렀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건 전깃불이 들어오는 그 순간만큼이나 짧았다. 급식실에서 빠르게 준비해 준 점심을 먹고 정수기 물을 마시고 준비한 자료를 화면에 띄워 수업을 했다.


전기의 소중함을 잊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전깃불이 들어오는 순간보다 더 짧았다. 나는 언제 전기가 간절했냐는 듯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켜 공문을 처리하고 문서를 출력했다. 소중함을 느끼기에 전기는 너무 당연했다. 너무 당연해서 소중한 줄 모르는 게 어디 전기뿐일까. 일상이, 시간이, 가족이, 다 그렇다. 내가 얼마나 많은 당연한 것들을 누리고 살고 있는지 떠올려본다. 내가 '살아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소름 돋게 소중해진다.

keyword
김채원 연애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교사 프로필
구독자 779
매거진의 이전글대충 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