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에는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려고 나갔는데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아이를 서둘러 보내고 집에 얼른 들어왔다. 이후로도 하늘은 잔뜩 흐렸지만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 비는 안 왔다. 저녁때가 돼서야 비가 조금 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산책을 할걸.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도 산책하기는 틀린 것 같다. 비가 와서 산책을 못할 때를 대비한 플랜 B라도 마련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인생은 불확실의 연속이다. 계획을 촘촘하게 세우면 세울수록,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를 다지면 다질수록 내가 고작 '인간'일뿐이라는 걸 상기시켜주기라도 하려는 듯 예기치 않은 일들이 벌어진다.
그럴 때를 대비한 비상시 계획까지 세운다면 인생을 조금 더 주도적으로 살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고작 인간일 뿐인 내가 예상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일들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 모든 가능성을 다 떠올리며 계획을 세우기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즐기기로 했다. 예기치 못한 일이 내 앞을 가로막으면 '오히려 좋아'를 외치며 핸들을 꺾거나 브레이크를 밟으면 될 일이다. 그렇게 가닿은 곳에서 또 그곳만의 행복을 발견할지도 모르니.
오늘 내 핸들은 세탁실과 팬트리 정리로 돌렸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현해 볼 생각이었다. 정리하기 전에 기준을 정했다.
내일 당장 이사 간다면 이 물건을 챙길 것인가?
YES면 남기고 NO면 버린다.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기준이었다. 순식간에 20L짜리 쓰레기봉투 몇 개가 가득 찼다. 그중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보관하던 물건들도 많았다. 쓸만하다는 이유로 못 버리던 물건들을 앞으로도 절대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미련 없이 버렸다. 속이 다 시원했다.
한참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훅 지나갔다. 점심을 챙겨 먹을 겨를도 없이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소처럼 일만 하다 혼자만의 시간이 다 가버렸다니 어쩐지 조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오늘은 자주 팬트리를 열어보며 나를 위로했다.
"조금 힘들었지만 괜찮아. 이것 좀 봐. 이렇게 말끔해졌잖아."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날씨 때문에, 혹은 다른 이유로 산책을 못하게 될 날이 많을 거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내 운전대의 방향을 내 마음대로 돌리며 낯선 행복을 찾아갈 거다. 하지만 다음에는 절대로 산책 대신 집안일을 선택하지는 않을 거다. 또다시 억울해진 걸 보니 세탁실 문을 한 번 더 열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