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벚꽃이 폈다.

날씨 확인할 때 기온만 보지 말고 풍속도 보기

by 김채원

드디어 벚꽃이 폈다. 늘 가던 동네 생태회랑로 말고 벚꽃길을 찾아가기로 했다. 생태회랑로에도 벚꽃이 쭉 이어져있지만 아직 나무들이 작고 귀엽다.


작고 귀여운 우리 동네 벚나무

벚꽃은 아무래도 크고 웅장하고 풍성해야 더 아름다우니까 벚꽃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오래된 동네를 찾아가야 한다. 서울에 여의도, 진해에 군항제, 하동에 십리벚꽃길이 있다면 순천에는 동천이 있다. 천변을 따라 쭉 늘어선 벚꽃이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평소처럼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나가려다가 오늘의 TPO(Time, Place, Occasion)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내가 가려는 곳은 순천의 벚꽃 명소다. 그곳을 찾는 이들은 누구일까? 벚꽃을 보며 봄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들? 아니면 봄빛만큼이나 따스한 파스텔톤의 마음을 가진 이들? 모르긴 몰라도 다들 나처럼 설렘을 한가득 안고 올 텐데 검정 레깅스에 회색 맨투맨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옷장을 뒤져서 새하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커다란 카라에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였다. 오랜만에 화장도 했다. 이제 누가 봐도 벚꽃을 만나러 가는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차를 끌고 나갔다. 주차할 데가 없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주차 공간은 여유로웠다. 게다가 내가 도착하자마자 벚꽃길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 한 대가 빠져나가면서 그 자리에 주차할 수 있게 되었다. 소소한 행운에 기분이 좋았다.


시동을 끄고 차 문을 여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살랑이는 봄바람을 기대했는데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오들오들 떨면서 벚꽃길에 들어섰다. 벚꽃은 예상대로 황홀했고 아직 덜 핀 개나리도 귀여웠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튤립과 양귀비도 반가웠고 하천의 윤슬도 아름다웠지만 이 모든 걸 거센 바람과 함께 해야 하니 덜 황홀하고 덜 귀엽고 덜 반갑고 덜 아름다웠다. 하필 카라가 큰 원피스를 입고 나와 자꾸만 카라가 얼굴을 덮쳤다. 새하얀 원피스에 파운데이션이라도 묻을세라 신경이 쓰였다.



벚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행히 완전히 만개한 건 아니었다. 며칠 뒤에 오면 더 예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손목에 찬 워치를 보니 고작 4,000보를 걸었다. 10,000보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꾸역꾸역 조금 더 걸었다.


지나가던 할머니 두 분이 나에게 말을 거셨다.

"오메, 꽃밭에 흰 옷을 입고 가니까 참말로 이쁘네!"

"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할머니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란디 좀 춥겄어. 우리는 내복도 챙겨 입고 나왔는디 치마 하나만 달랑 입고 안 추운가?"

"그쵸? 저 춥겠죠? 안 그래도 그래서 지금 집에 가려고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건드려주신 할머니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가는데 등 뒤에서 할머니들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들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니 다들 경량패딩 하나씩은 걸치고 있었다. 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렇게 좋은 봄날에 칙칙한 검정, 남색, 회색인 사람들을 보며 어쩐지 안타까웠다.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의 새하얀 원피스에 한 번쯤은 머무르는 걸 느꼈다. 괜히 신경이 쓰여 최대한 안 추운 표정으로, 최대한 떨지 않고, 최대한 여유 있는 척하며 걸었다.


차 안은 따뜻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렇지 기온이 낮은 건 아니었다. 날씨를 확인할 때는 기온만 볼 게 아니라 풍속도 봐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쉬운 마음에 시동도 켜지 않고 차 앞유리 너머로 보이는 벚꽃을 한참 쳐다봤다. 벚꽃 터널 안에 있을 때 보다 훨씬 황홀한 기분이었다. 이번 주에 다시 한번 벚꽃을 보러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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