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시간이 아까워

안 걸으면 뭐라도 할 줄 알았지

by 김채원

오늘은 건강상의 이유로 산책로에 나가지 않았다. 지난밤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오셔서 소주를 많이 마신 게 화근이었다. 속이 안 좋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하는 증상은 없었지만 그냥 미치도록 피곤했다. 일찍 잠자리에 들긴 했지만 4시에 눈이 번쩍 떠졌으니 피곤할만하다. 아이들 학교, 유치원만 얼른 데려다주고 바로 집에 들어왔다.


나는 자주 시간을 아까워한다. 그래서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못하고 꼭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한다. 지금도 글을 쓰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글을 다 쓴 다음에 보내야 할 중요한 메일 내용을 정리하고 있고, 틈틈이 시계도 보면서 1시간 뒤 학교교육설명회에 갈 때 무슨 옷을 입을지 고르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효율은 굉장히 떨어지는 것 같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이렇게 사는 건 불안하기 때문이 아닐까.


당연히 걷는 시간도 늘 아까워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긴 하지만 매일 1시간을 걷는 데 쓰는 게 정말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래서 쭈그려 앉아 싱그럽게 모여있는 클로버를 보다가도 나도 모르게 "이럴 시간이 없어!"하고 내뱉으며 두 손으로 무릎을 꾹 눌러 벌떡 일어나곤 한다.


나의 30초를 빼앗은 클로버. 만져봤는데 부드럽고 촉촉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도 걸어보고 잠깐씩 달려보기도 했는데 내가 빨리 걷는 동안 시간도 빨리 가는 건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오디오 콘텐츠를 들으면서 걷는다. 걸으면서 콘텐츠를 들으면 기분도 좋고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가끔 풍경에 마음이 팔려 콘텐츠 내용을 못 따라가거나 콘텐츠 내용에 집중을 하느라 경치를 마음껏 누리지 못해서 아쉽기도 하다.


오늘은 산책을 안 했으니 1시간이 더 생겼다. 나는 나에게 1시간이 더 생기면 엄청난 일을 해낼 줄 알았다. 그런데 1시간이 더 생겼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여유로워지기만 했다. 침대에 뒹굴뒹굴 누워서 폰만 만지작 거리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꾸역꾸역 일어났는데 이미 오전은 다 가고 없다. 산책을 나갈 때마다 로봇청소기를 돌려놓고 나가는데 막상 집에 있으니 그 마저도 귀찮아서 안 했다. 오히려 1시간이 줄어든 것 같다.


새삼 루틴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느낀다. 루틴이 없다면 언제, 무엇을 할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나 같은 인간에게는 몇 분이 걸릴지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하면 아무 생각 없이 하게 된다.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거다. 내일은 아이들 유치원 보내고 나서 바로 산책로로 가야겠다. 걷는 시간을 아끼면 누워있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걸 알았으니 아까워하지 않고 여유롭게 걸어야겠다. 어제 본 꽃봉오리가 내일은 얼마나 피었을지 궁금하다.

하루가 다른 꽃봉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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