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리스트 남편 덕분에 알게된 것
해마다 여름이 되면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를 검색한다. 포털사이트에 뜬 흑백사진 속 그의 얼굴을 보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는 에어컨을 발명한 사람이다. 폭염에서 전 세계인을 구한 위인이다.
며칠 전 에어컨이 고장 났다. 잘 돌아가던 녀석이 "실외기 전원을 확인해 주세요."라는 경고를 남기고 꺼져버렸다. 실외기를 확인해 봤지만, 특별히 이상은 없어 보였다. 결국 AS 신청을 했고 5일 뒤에 수리기사가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의지할 건 선풍기밖에 없었다. 미풍에서 약풍으로, 약풍에서 강풍으로 바람의 세기를 키워갔지만, 소리만 점점 커지는 기분이었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익숙한 우리에게 선풍기의 미지근한 바람은 성에 차지 않았다. 3살짜리한테 안마를 받는 기분이랄까.
미지근한 바람보다 더 큰 문제도 있었다. 에어컨은 거실 구석구석 공기를 차갑게 만들어 주는 반면 선풍기 바람이 닿는 공간은 제한적이다. 회전 버튼을 누르면 바람이 조금 더 넓게 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바람을 쐬려면 선풍기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우리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있어야 모두에게 골고루 바람이 갈 수 있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갑자기 작년 여름 우리 집에서 서큘레이터를 본 기억이 났다. 우리 집에 있는 거의 모든 물건이 그렇듯, 서큘레이터도 남편이 사 놓은 거였다. 처음 서큘레이터를 마주한 날, 에어컨에 선풍기까지 있는데 서큘레이터를 왜 샀느냐며 남편을 타박했었기에 내가 먼저 서큘레이터 얘기를 꺼내기가 민망했지만, 체면이나 차릴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 집에 서큘레이터 있지 않아?"
"아 맞다!"
선풍기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서큘레이터를 놓고 틀었다. "와, 이제 좀 살겠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는 미니멀리스트에 가깝고 남편은 맥시멀리스트에 가깝다. 나는 필요한 물건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만 사는 편이고, 남편은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건을 필요하기 전에 넉넉히 사는 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서로에게 불만이 있다. 나는 팬트리를 가득 채운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미리 준비한 물건'들을 보면 답답함을 느끼고 남편은 양파를 산다고 마트에 간 내가 정말 딱 양파만 사 와서 실망한다. 양파를 사러 가서 양파를 사 온 건데 뭐가 문제냐고 하면, 날씨도 더운데 간 김에 아이스크림도 좀 사 오지 달랑 양파만 사 왔냐며 입을 삐죽 내민다.
요즘엔 미니멀라이프가 더 유행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맥시멀리스트인 남편은 틀렸고, 미니멀리스트인 내가 옳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어컨이 고장 나고 보니 미니멀라이프가 정답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맥시멀리스트 남편의 도움을 받은 건 이번만이 아니다. 내가 외출하거나 여행을 갈 때면 남편은 여행 일정에 맞는 용량의 보조배터리를 챙겨준다. 보조배터리를 종류별로 사는 남편은 별로지만 당일치기 일정에는 작고 귀여운 보조배터리를, 2박 3일 일정에는 벽돌만 한 보조배터리를 챙겨주는 남편은 좋다. 아이들 장난감 건전지가 다 닳아도 걱정이 없다. 우리 집에는 항상 AA 건전지와 AAA 건전지는 물론이고 원형 건전지도 넉넉히 준비되어 있다. 얼마 전에도 남편이 치약을 12개나 사서 한숨을 쉬었지만, 모든 걸 쟁여놓는 남편 덕분에 편리한 것도 사실이다.
생각해 보니 극단적인 미니멀라이프나 극단적인 맥시멀라이프보다 적당히라이프가 가장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미니멀리스트인 나와 맥시멀리스트인 남편이 만나 적당히라이프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서로 너무 달라서 이해하기 힘든 우리지만, 그 덕에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살아가니 잘 만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