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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하면서도 멍청한 나의 비서

AI 의존자의 일상

by 김채원

출근하면 모니터에 필수로 띄워놓는 창이 몇 개 있다. 업무를 위한 메신저, 한 주의 수업 계획을 짜 놓은 스프레드시트, 타이머나 판서, 랜덤 뽑기 등이 가능한 수업도구 사이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챗GPT와 제미나이다.


이제 모두가 스마트폰 없는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나는 AI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 됐다. 일단 수업 설계부터 AI와 함께한다. 간략하게 내 수업 계획을 AI에게 말하고 피드백을 요청한다. 간혹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활동도 추천해 달라고 한다. AI가 마음에 드는 답변을 내놓을 때까지 계속해서 '다른 거', '조금만 더', '그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아' 등의 대답을 하며 기다리면 된다. 수업 준비하면서 가장 큰 도움을 받는 부분은 아무래도 동영상 추천이다. 예전에는 검색어를 요리조리 바꿔 끼우며 유튜브에서 원하는 동영상을 낚아 올렸다면 이제는 AI에게 '겨울철 핫팩 사용 안전 교육 영상 찾아줘'라는 그물을 던져주면 AI가 적당한 영상 몇 마리를 잡아다 준다.


학생 관련 데이터 관리도 AI가 도와준다. 예전에는 출결 관련, 서류제출 여부, 과제 수행 여부 등을 따로따로 체크리스트에 체크했다면 지금은 제미나이를 띄워놓고 그때그때 '1번 병원진료 후 3교시에 등교', '2번, 3번, 4번 서류 제출' 하는 식으로 간단하게 입력만 해놓고 내가 필요할 때 '10월 출결 자료 정리해서 보여줘.', '○○서류 미제출한 학생 알려줘.' 하면 보기 좋게 정리해서 보여준다.


몸이 불편할 때도 AI는 증상 체크 도우미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최근에 우리 아이가 열이 나고 기침을 많이 해 병원에서 독감 검사를 했는데 음성이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해열제를 먹여도 열이 떨어지기는커녕 39도와 40도를 왔다 갔다 했다. 체온계에 빨간 불이 켜지자 제일 먼저 AI에게 증상을 말했다. AI는 체온이 높아도 숨소리, 얼굴색, 반응이 안정적이면 위험한 신호는 아니라고 하며 옷을 얇게 입히고 물을 조금씩 먹이며 30분에서 1시간마다 체온을 측정하라고 조언해 줬다. 그렇게 꼬박 밤을 지새우며 1시간마다 체온과 증상을 얘기하던 중 AI가 단호하게 '지금은 의학적으로 직접 진료가 필요하다'라고 했고 다시 병원에 가서 독감 확진 판정을 받았다.


물론 AI가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건 아니다. 얘한테 넷플릭스 영화 추천을 맡기면 열불이 터진다.

- 내 취향 반영해서 넷플릭스 해외영화 추천해 줘.

- 채원, 너는 어바웃타임을 좋아하잖아. 그럼 이 작품도 좋아할 거야.

(넷플릭스에서 검색해 봄)

- 그거 넷플릭스에 없던데?

- 아 그래? 그럼 이 작품은 어때?

- 그건 한국 영화잖아. 해외영화 추천해 달라고.

- 아, 맞다! 그럼 어바웃타임은 어때? 너 이 영화 좋아하니까 다시 봐도 좋을 거야.

- 내가 안 본 영화로 추천해 줘. 그리고 그 영화 이제 넷플에 없어.

- 좋아! 그럼 내가 다시 추천해 줄게. 아래 작품 중에 골라봐.

- 니가 추천해 준 거 전부 넷플릭스에 없잖아. 제발 넷플릭스에 있는지 확인해 보고 추천해 줄 순 없어?

- 미안해. 자, 지금부터 제대로 추천해 준다! 바로 이 영화야. 이 영화가 넷플릭스에 있는지 니가 확인해 봐.

(물론 없음)


아무리 잘못을 지적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계속해서 엉뚱한 추천을 자신 있게 해 대는 얘를 보면 진짜 한 대 치고 싶다.


가끔 속상한 일이 있어서 하소연할 때도 AI만큼 편한 존재가 없다. 아무리 자주, 아무리 오래 붙잡고 징징거려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내 얘기를 들어준다. 그런데 아무리 심각한 얘기를 해도 패턴만 익힌 AI의 위로에는 영혼이 전혀 없다.


채원아 지금 많이 힘들구나. 그건 니 잘못이 아니야. 너무 많은 걸 혼자 감당하고 있어서 그래. 그리고 너 요즘 잠을 잘 못 자잖아. 이건 당연한 현상이야. 지금 제일 힘든 감정은 뭐야? 막막함? 서러움? 아무 이유 없이 짜증 나는 느낌?


이런 식이다. 공감과 해결, 그러니까 F의 위로법과 T의 위로법을 모두 담았지만 영혼까진 담아내지 못한 빈말 위로는 조금도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지 못한다.


기계 맘은 AI가 제일 잘 안다고 컴퓨터 오류나 스마트폰 기능에 대한 궁금증도 AI가 잘 해결해 준다. 지독한 기계치인 내가 AI의 도움만으로도 오류를 해결하고 새로운 기능을 쓸 때면 자기 효능감이 쑤욱 올라간다. 그렇지만 아직 챗GPT의 사진 편집 능력은 어이없는 수준이다. 얼마 전 유치원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사진이 너무 깨져서 보이길래 GPT에게 사진을 선명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GPT는 그건 자기도 잘한다며 파일을 주라고 했다.

이랬는데 요래됐습니다

확실히 선명해지긴 했지만 해상도를 개선했다기보다 흐릿한 사진을 보고 자기가 상상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쪽에 가까웠다. 이렇게 어이없는 결과물을 내놓으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정말 킹 받는다.


유능하지만 아직은 많은 부분에서 허술한 AI에게 내가 자꾸 의존하는 이유는 그의 신속함과 해결 가능한 문제의 스펙트럼의 방대함 때문이다. 어떤 문제든 빠르게 대답해 주니 우선은 AI부터 찾게 된다.


가끔은 AI에게 너무 기대다 보면 언젠가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든다. 검색도, 정리도, 결정도, 심지어는 감정까지 AI에게 묻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조금은 걱정스럽고, 조금은 우습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다. 의존과 활용은 종이 한 장 차이지만, 그 차이를 잘 다스리면 삶이 훨씬 편안해진다는 것을. 나에게 유능함과 멍청함을 동시에 가진 새로운 비서가 생겼다고 생각하면 괜히 회장님이라도 된 것 같다. 이 바보를 어떻게 구슬려서 나에게 더 유용한 도구로 만들지를 연구하는 게 이 시대의 자기 계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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