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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지않는돌고래 Jan 11. 2019

미혼모와 남편 어드밴티지 그리고 영혼이 사라진 날

새벽의 육아잡담록 13

1.

얼마 전, 아내와 "너의 목소리가 보여(초대된 연예인들이 겉모습만으로 음치를 색출하는 예능입니다. 놀라운 실력자가 많이 등장하지요)"를 보았다. 한 출연자의 설명에, 미혼모, 라고 뜬 순간, 울컥이다. 아내는 이미 눈물이다.


아내와 나는 둘이 한 명을 키우는데도 으아, 진짜 으아, 한 번 더 으아, 이다. 홀로 아이를 키우면 얼마나 으아, 일지 ‘저는 미혼모입니다’ 한마디에 그녀의 삶이 통째로, 쿵, 온 게다.

  

모든 사람 그렇듯, 나 또한 삶에서 고된 순간 있었으나 혼자 아이를 키워낸다는 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같은 인간이지만 괴물처럼 강한 사람도, 세상엔 있는 법인가 보다.

 

2. 

허나, 인간은 망각이란 호사를 누리는 동물 아니던가. 


지난 30일간 하루가 무얼 원하는지 알아내는 능력에 제법 건방져져서 에헴, 한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건방져졌냐면 아내 혼자 3박 4일 여행 갔다 와도 문제없겠는데, 라고 생각할 정도다.


육아계에서 남편은 두뇌회전과 체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는 어드밴티지가 확. 실. 히. 작용한다. 모유수유를 하지 않아 잠을 더 잘 수 있어 상대적으로 뇌세포가 활기차고 직접 출산을 하지 않았으므로 몸이 덜 작살나 있기 때문이다. 해도 인간은 받은 건 모르고 주는 것만 아는 동물 아니던가.


순간, 이 모든 어드밴티지를 망각하고 


'어라, 어쩌면 나는 육아의 매지션? 뒤늦게 적성 발견? 노후는 산후관리사?' 라고 혼자 생각해버린다.

 

그야말로 기. 세. 등. 등.


3.

퇴근 후다. 


아내가 케잌을 먹고 싶다 해 바람도 쐴 겸 천천히 홍대에 다녀오라 했다. 나는 하루를 달래고 분유를 먹이면서도 원고를 독촉하고 고료 정산까지 마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 요즘 같아선 사나이의 정점에 선 기분이라 나대버리고 만 것이다.


왜 나댔다는 생각이 드냐면 어라, 하루가 평소와 다르게 기저귀를 갈아줘도, 분유를 먹여도, 속을 풀어줘도,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분 진정, 5분 울음이 반복된다. 마치 닥터 스트레인지와 도르마무의 싸움이랄까.


*. 주: 마블 시리즈를 모르는 분들에겐 죄송합니다. 마블 세계관에서 도르마무는 어둡고 악한 차원의 신이자 우주적 존재로 수많은 차원을 식민지로 삼고 있는 끝판왕급 친구입니다. 기본 능력치로 따지면 최근 영화로 널리 알려진 타노스보다 강한 존재이지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베네딕트 컴퍼비치가 연기한 최고의 마법사 닥터 스트레인지가 “도르마무! 거래를 하러 왔다!” 며 시간을 반복해 도르마무에게 계속 죽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는 도르마무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해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 가두어 지구를 구하려는 그의 지혜였지요.


최근, 기저귀 확인, 배고픔 확인, 속 불편 확인, 소소한 등 센서 작동 확인이라는 4박자 안에 신생아는 대부분 문제가 해결된다는 마법의 지혜를 분명, 손에 넣었다. 헌데, 안 된다. 오늘은, 안 된다. 정말, 안. 된. 다. 됐다 싶으면 또 안 되어버리고 만다. 영혼이 사그작, 사그작, 사라진다.

 

영혼을 팔아버린 대가일까, 4년 같은 40분이 지나고 나서야 인류의 평화가 찾아온다. 

   

4.

이제와 복기해 보니, 속 불편과 배고픔과 잠투정이 시간차 없이 거의 동시에 왔다. 속을 풀어주는 와중에(턱을 잡고 기울인 후, 등을 토닥여줍니다) 배고픔이 왔음에도 속을 풀어주었으니 울었다. 다음으로 배고픔이 찾아와 분유를 먹이는데 잠투정이 찾아왔다. 분유를 그만 먹고 자고 싶은데 계속 먹이려 했던 게 패착으로 판단된다.


내게 시간과 체력이 무한정 있다면 보다 면밀히 관찰해 섬세한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지만 아기가 울고 있는데 이 모든 일을 동시에 살펴 대처하는 건 진짜 마법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게다. 


후아.

 

5.

육아는 참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말고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아야 했는데 나대고 말았다.


오늘 또 한 번,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 무탈하게 오래도록 버티는 것)의 근본이요,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며 스스로의 육아를 생각한다.



생후 45일의 하루. 울기 시작하면 도르마무가 됩니다. 나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되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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