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좋아하기 위한 나만의 노력들
“여름은 너무 짦아. 1년 중에 10개월은 여름이었으면 좋겠어.”
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미쳤냐고 한다. 그만큼 여름이 너무너무 좋다. 에어컨 공기가 남아있는 시원한 방에서 살랑살랑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 맞으면서 일어나는 아침. 나뭇잎이 가득해서 온세상이 초록초록 싱그러워 보인다. 불 안 쓰고도 토마토, 오이, 계란만 있으면 한 끼 식사도 뚝딱 만들 수 있다. 여름 밤, 온 몸이 축축해질 정도로 습습한 공기를 이겨내며 달리기를 하는 것도 좋다. 하루를 바삐 살아도 저녁 8시까지 햇빛을 볼 수 있으니 하루가 참 알차다. 여름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여름을 좋아하는 만큼 겨울이 참 싫다. 길고 길었던 여름이 끝나고 - 아주 짤막한 가을이 스치고 - 갑자기 겨울이 왔다. 아침에 싸늘한 공기 때문에 이불 밖으로 영 나가기가 싫다. 그러니까 자꾸 잠이 온다. 뜨거운 물로 씻고 나오면 온 몸이 바삭해져서 허겁지겁 로션을 바른다. 겨울에는 바디로션도 듬뿍 듬뿍 바르는데 영 귀찮은 게 아니다. 아무리 발라도 또 건조하다. 겨울 옷도 싫다. 겹겹이 껴입는 것도 귀찮은데, 옷을 맞춰 입는 것도 참 귀찮다. 그렇게 애써 입고 나가도 추워 죽겠다. 뾰족한 공기가 얼굴도 때리고 손과 발도 푹푹 찌른다. 장갑을 끼다가 핸드폰 만지려고 잠깐 벗으면 또 엄청 손가락이 시렵다. 한 번 아린 손가락은 다시 데우기가 쉽지 않다. 먹는 건 또 어떤가? 추우니까 따뜻한 음식 해먹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걸린다. 재료 다듬고 끓이고 간 맞추고. 자꾸만 웅크리고 이불을 찾고 가만히 있게 된다.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왔고 나는 틈틈이 겨울을 싫어했다. 아직 제대로 겨울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겨울이 끝나기를 바라다가, 문득 이러다가 나 겨울 내내 짜증내고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을 사랑할 순 없겠지만, 이 계절 내내 괴로워하면 나만 손해잖아. 1년 중 1/4을 이렇게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이번 겨울은 좀 노력해보기로 했다. 겨울을 좋아해보기로.
일단 귤 한 박스를 샀다. 예전에 같은 회사를 다니던 동료분이 종종 제주 감귤 주문을 받았다. 부모님이 제주도에서 귤농장을 하신다고. 한 번 먹어봐야지 벼르고 있다가 기회를 놓쳤는데, 마침 올해 주문을 받는다는 알림이 떴다. 보자마자 냅다 귤을 주문했다. 이제 막 딴 귤이 집에 왔는데도 바빠서 박스를 열어보지도 못하다가, 주말이 되어서야 귤을 까먹어봤다. 귤 한 알을 까서 입에 넣고 오물거리니 탱글탱글 상큼하다. 하나만으로는 멈출 수 없어서 또 까먹고, 또 줄줄이 먹었다. 운전하는 짝꿍 입에도 한 알 넣어주었다. 글쓰면서 또 먹고, 소파에서 또 먹고, 침대에서 책읽다가 또 먹다보니 어느새 귤무덤 완성. 귤 먹는 맛에 겨울을 좋아할 수도 있겠다 싶다.
스테인리스 주전자도 샀다. 엄마랑 제주 여행 중에 어떤 식당에서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내어주었다. 이게 있으면 겨울 내내 작두콩차도 끓여먹고, 보리차도 끓여먹고 좋지 않을까? 주전자가 갖고 싶어졌다. 당장 인터넷에 검색해봤다. 바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주전자 발견. 주전자 부리 대신에 짤막하게 주전자 입이 파여있고, 입구가 크고 넓은 디자인이었다. 깊이가 꽤 깊어서 오뎅꼬치를 넣고 끓여먹기도 좋다. 냄비 대신에 휘뚜루 마뚜루 라면 끓어먹기에도 딱 좋다. 거름망도 있어서 작두콩차랑 보리차도 끓여마셔야지. 이거 완전 겨울 아이템이잖아! 뭔가 무기를 하나 얻은 느낌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좋아하진 않지만 트리를 꺼낸다. 올해도 늘 그랬듯이 전구만 걸쳐볼까 하다가, 이번 트리는 데코를 추가하기로 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리본 트리가 예뻐서, 다이소에서 리본을 사왔다. 빨간 리본을 살까 하얀 리본을 살까 고민하다가 둘 다 사왔다. 나뭇가지를 하나하나 피고 모양을 잡아준다. 그 위에 리본을 묶는다. 꽤나 그럴듯한 트리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 트리는 짧으면 2주, 길면 4주 정도 거실에 함께 할 것 같다.
다음 아이템은 극세사 수면 잠옷. 온기없이 바스락 거리는 이불에 들어가기 싫어서 보들보들한 수면 잠옷을 하나 샀다. 몇 년 전에 짱구가 입었던 잠옷 디자인의 극세사 잠옷이 있었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져버렸다. 쿠팡에서 연한 핑크색으로 된 잠옷을 주문했다. 생활복이나 다름없는 수면잠옷을 입고 양말도 신는다. 확실히 몸이 뜨뜻하다. 잠옷이 훅-하고 나를 덮는 느낌이다. 항상 집에서 반팔만 입고 다녀서 이런 뭉툭한 옷이 걸쳐있는게 좀 어색하긴 한데 몸이 따뜻하니 움직이게 된다.
최근에 친구한테 선물받은 종이 인센스도 부지런히 피워본다. 인센스는 겨울 공기를 즐기는데 아주 도움이 된다. 초저녁 쯤 종이 인센스 하나를 뜯어 지지대 위에 꽂는다. 불을 붙여주면 연기가 몽글몽글하게 피어올라서 조명 밑 공기 사이로 피어오른다. 아무생각없이 연기를 바라본다. 쌉싸름한 공기가 살짝 따수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알싸한 공기랑 참 잘 어울린다.
사계절을 온전히 즐기다보면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을 봤었다. 겨울은 여전히 춥고 느리지만 나름대로 즐길 만한 것들을 찾으면 이 계절도 잘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 인생의 1/4을 차지할 이 겨울과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 물론 그렇다고 겨울이 내 최애 계절이 되진 않겠지만. 지금도 트리 앞에서 겨울 잠옷을 입고 인센스를 피우고 글을 쓰면서 귤을 까먹고 있다. 또 금방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