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다 어게인

자기 계발의 길을 찾아서 10년 만에 영어 지문을 읽게 된 사연

by 김촉

어느덧 벌써 공무원 생활 8년 차가 되었다. 얼마 전 감사하게도 깜찍한 장기재직 휴가까지 생겼다. 라떼 신규 시절에는 장기재직 휴가라는 단어는 20년 차 이상들에게나 있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5년 차 이상 공무원들에게도 귀여운 장기재직 휴가를 준다. 조직 어른들에게나 주어졌던 장기재직 휴가가 생기니 제법 고인물이 된 기분이 든다. 마냥 막내 업무만 맡아왔었는데, 어느새 조직의 허리… 까지는 아니고 골반과 허벅지 언저리까지는 올라온 것 같다. 후배들도 많이 생겼다.(물론 나보다 먼저 승진한 후배들도 생겼다…)


공무원 조직에는 다양한 부서가 있는 만큼 다양한 업무들이 있지만, 여태까지 내가 맡았던 업무는 매우 깜찍한 단위사업(매우 감사하게도 내 사업에 사장님이나 국장님이 별로 관심이 없음)이나 '부서 지원' 업무 정도였다. 부서 지원 업무라 함은 사기업에는 없는 업무인데, 공무원 조직에서는 이것을 '서무'라고 부른다. 부서 필요 물품도 사고, 부서 내 행사도 준비하고, 서 내에 남들이 하지 않는 '타 직원에게 속하지 아니하는 사항'들을 해 내는 지원 업무이다. 서무 업무를 하다 보면 소속 부서가 어디가 되었든 간에 부서 내에서 하는 일이 비슷해서 업무에 빠르게 익숙해진다. 또는 매우 깜찍한 단위사업을 맡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책임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일하는 데 써야 할 에너지는 남게 되고, 남은 에너지를 가지고 회사 인간관계에 투자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가 공감하시겠지만, 회사에서 인간관계에 에너지를 쓰면 쓸수록 나에게는 손해였다. 나는 점점 내가 인간관계 내에서 소진되어 간다고 느꼈고, 전문가 상담을 통해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쓸 것을 처방받았다.


그래서 올해는 미루고 미뤄왔던 외국어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직장을 다닌다는 핑계를 대며 자율학습이나 인강을 통해서는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아 현장 강의를 수강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은 일본어 시험을 대비하는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지만, 먼저 영어 시험공부를 하기로 했다. 주변에서 왕왕 들으며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었던 ‘자기 계발의 끝’이라는 대학원 준비에 걸음을 떼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인생이 재미없으면 대학원을 가라’고 추천해 준 친구가 말하길, 너무 힘들어서 인생이 재미있어진단다. 대학원을 간다면 조금이라도 젊을 때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더 늦지 않게 지금 기회를 준비해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마침 신년사주를 보니 올해 시험 운이 좋다고 한다. 일단 저지르고 봤다.


설 연휴를 진득하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보내고 난 뒤, 연휴가 끝난 월요일 첫 수업에 들어갔다. 실제 시험과 비슷한 난이도의 독해 지문이 펼쳐졌다. 1분에 1문제를 풀어야 한단다. '오우 저 아직 다 못 풀었는ㄷ…' 하는 순간 시간이 끝나버렸다. 다음으로는 청해 문제를 풀라고 했다. '음… 뭐라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영어 성적을 위해 학원을 찾은 것은 대략 십몇 년 만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였나, 2학년 때였나. 여름방학에 남들 다 한다는 토익 점수를 가져보려고 한 달 정도 다닌 것이 전부였다. 수업 들은 게 아까워서 시험까지 치긴 했던 것 같은데, 점수가 몇 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에는 공무원을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토익 점수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우주를 뚫고 나간 경쟁률을 자랑하던 시절 공무원 시험을 보는 바람에 영어 단어장을 통째로 외우긴 했던 것 같다… 마는 그것도 무려 9년 전 일이다.


아주아주 높은 점수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어느 정도는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험을 보기로 결심했건만, 학원에서 마주한 현실은 처참했다. 내가 30대라서 귀가 안 들리는 건가, 아님 영어로 된 지문을 안 본 지 9년이 되어서 머리가 굳은 건가 생각하며 첫 수업을 마쳤다. 그래도 해보는 데까지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을 먹고 나니 매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도 다녀야 하고, 30대의 몸은 운동도 필요하기 때문에(운동하지 않으면 아파진다…) 하루에 2~3시간 정도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운동 안 해도 건강할 수 있고 회사를 아직 안 다녀도 되는 20대 초반의 삶을 부러워하며 일이 끝나면 공부를 하러 가방을 싸들고 조용한 공간들을 찾게 되었다.


이제 학원을 다닌 지 2주가 되었다. 아직 수업 내용의 반도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사이 매일 공부한 덕분에 이제는 독해 시간도 제법 모자라지 않고, 청해 문제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공부로 인한 성취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외국어 공부, 특히 시험용 외국어 공부는 성취를 이루는 데 아주 좋다는 생각이 든다. 맞은 문제의 개수가 늘어나는 것이 눈으로 보이고, 결과적으로 시험 성적이라는 것이 남을 테니 말이다.


공무원 시험을 치고 세상 사람들이 흔히 인정하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된 이후, 나는 특별히 나를 위한 인생의 목표를 가진 적은 없었다. 그저 현실의 시간들에 충실해보자고 생각하고 회사 생활에 열심을 다했다. 하지만 안이하게도, 나는 늘 이 축복받은 안정 속에서 단조로움을 느껴왔다. 물론 내 직업은 내가 선택한 것이므로 지금의 직업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축복 속의 단조로움을 품은 회사 생활을 앞으로 20년 이상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이 종종 막막하게 다가오고는 했다. 그런데 영어 시험 점수라는 아주 작은 목표가 생기고 나니 순식간에 삶이 그 작은 목표를 향하기 시작했다. 10년도 더 전에 하던 공부를 지금 다시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도전이었으므로, 나의 생활은 소소하게 활기를 찾았다.


혹시나 아직 올해 무엇을 할지 결정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아주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해 망설이고 있다면, 이전에는 했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 것들을 다시 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아직 녹슬지 않았음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10년 만에 파고다 어게인을 외치며 오늘도 영어 시험공부를 시작해 본다.



음… 역시 뭐라는 거지… 싶지만 이것들도 조금씩 쌓이다 보면 분명 나아질 것이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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