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뭐하니? ...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1. 가만있어봐요.
그러니까 합격이예요 불합격이예요?
경험이 참 다양하고 많네요. 글을 잘 쓰나 본데? 대학생 기자단부터 영화제 홍보까지.
참 많고 좋은데. 아~ 이거 아쉽네. 자격증이 없네 자격증이.
아니 세상에 ! 워드 프로세스 3급 따면 취업에 유리하다고 해서 땄고, 영어 공부하래서 영어 공부했는데 업무에 전혀 관련도 없고, 대외활동 하면 좋대서 갖은 기자단은 죄다 했는데. 경험은 다양하니 좋지만 귀사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럼 차라리 빨리 말해요. 불합격이라고.
2. 오늘도 당신의 실패 스펙이 상승했습니다.
사람이 자꾸 거절을 당하다보면 느낌이 온다. 먼저는 칭찬이 나온다. 그 다음으로 본론에 들어가는데 이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표정관리가 전혀 안되는 곤욕의 연속일 뿐이다. 당해본 바로 거절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희한하게 몸에 난 상처는 여러번 반복되면 굳은살이 박히기도 하는데, 마음에 난 상처는 단단해지지도 않고 오히려 물러 터진다. 이건 취업뿐만이 아니었다. 그 때의 나는 사람들 관계마저도 다 물러 터져서 더 이상 내가 기댈곳이 없었다. 속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 나에게도 속시원히 말할 대나무 숲같은 게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이게 떠올랐다. 초등학교부터 분노로 써오던 나만의 데쓰노트 일기장.
3. 당신이 이 글을 10년 뒤에 봤을 때에는...
묵혀둔 일기장을 꺼내 읽으니 그 시절 내가 떠올랐다. 나의 어린시절 일기장은 '데스노트'의 목적은 분명했다. 대나무숲. 어디가서 소리지를 깜냥도 되지 않던 내성적이고, 공상과 상상을 좋아하던 나는 나만의 대나무숲을 일기장에 가꿔나가기 시작했다. 하루의 장면 장면을 글로 적어가며 어느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할 철저히 나만의 이야기를 적어나갔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부터는 일기를 적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적을 일이 많았다. 매일이 힘들고 지침의 연속이었고 하루의 고통을 다시금 떠올려 글을 적고 싶은 기분도, 이유 또한 없었다.
그렇게 이십대 중반부터는 취업도 불투명하고 모아둔 돈도 없는데다가 누구 하나 의지할 수 없는 꽉 막힌 지금의 순간이 너무도 답답했다. 그리고 이 답답함을 풀어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만나 왠종일 수다를 떨기도 하고, 혼자 여행을 떠나보기도 했지만 결국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끈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어릴 적 써내려간 일기장이었다.
그렇게 나는 마치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주인공 폴이 과거를 만나기 위해 한 입 베어물던 마들렌처럼 내 기억 속 유일한 탈출구를 꺼내 펼쳤다. 여러권의 일기장 중에서 유일하게 열쇠고리가 달린 갈색 테두리의 일기장. 해리포터의 비밀 마법이 숨겨져 있을 것 같던 그 갈색 테두리의 일기장. 거기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일기를 10년 뒤에 봤을 땐 그 땐 그랬지 하며 웃을것.' 그 당시 어린 내가 살기 위한 발버둥. 여기에 적어내고 나면 모두 털어버릴 것이란 약속. 그러나 막상 10년이 지난 지금도 실패와 두려움으로 가득찼던 나는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이런 글을 적었다. '미안한데.. 그 약속 10년만 더 미루자.'
4. 나의 또 다른 멈춤으로 시작되는 것.
작가요? 오 감사합니다. 이십 대 후반까지도 글 쓰는 일을 전전하던 나는 드디어 출근!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됐다. 라디오 방송국 작가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날도 어느때처럼 라디오 부스 밖에 앉아 다닥다닥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때였다. 삼, 이, 일! 온에어와 함께 내가 쓴 오프닝이 흘러 나왔다. "우리는 삶의 속도를 줄여야만, 행복의 속도를 올릴 수 있다. 행복의 속도는 나의 또 다른 멈춤으로 시작되는것. 결국, 우리는 행복하기를 멈출 수 없다. 안녕하세요~주말 라디오 00입니다..." 그 순간 종이에 묵였던 글자 하나 하나가 스피커를 통해 춤을 추듯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더 큰 일을 내야겠다. 지금 여기서 멈추면 안 될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방송국을 나왔다. 그리고 그 날 곧바로 시나리오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5. "저희가 뭐라고 부를까요.
작가님? 감독님?"
누나~ 누나라고만 안부르면 되는거 아닐까요? 하하. 나는 왜 이 중요한 상황에서도 위기를 넘길만한 멘트가 없을지 궁리중인지. 그러곤 곧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떠올랐다. 혀를 내밀고 눈을 부릅뜨면 이 어색하고 난감한. 그리고 무거운 상황에서 내가 펑하고 사라질 수 있을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조용한 밀실같은 회의실에 앉아 있었고, 내 앞에는 내가 쓴 시나리오를 심각하게 분석중인 촬영감독, 조연출, PD 가 마주 앉아 있었다. 나이로 봐서는 내가 한참 누나인 사실은 맞지만 영화가 뭔지 알리가 없는 나는 그 사이에서 숨마저도 최대한 작게 내뱉길 반복했다. 스탭들 모두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었고, 아마도 내 시나리오를 보면서 많이 당황했던 것 같았다. 나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눈 앞이 캄캄했다. 한 참의 침묵이 지나고,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손끝이 보이자, "가암...작가님 그럼 이렇게 진행하시죠." 어째 나는 감독도 아니고 작가도 아닌 이상한 별칭 가암..작가라는 이름과 함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6. 이거 NG예요? OK예요?
그러게 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쓴 글에는 이런 장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 아니 맞는것 같기도 하구요. 한 번 더 찍으면 어떨까요? 찍어도 돼요? 아님 그냥 다음장면으로 갈까요? 자문자답을 넘어서서 이제는 자아성찰까지 곧 이어질 나의 독백. 갑자기 덜컬 찍게 된 내 인생 첫 영화는 이제껏 내가 고민해본 적 없는 수 만가지의 뇌회로를 작동시켰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따른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눈에 선했고, 작가인지 감독인지 모를 저 사람이 대체 여기서 무얼 하는지 궁금해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거기다 영화한답시고 그만둔 라디오 작가와 이제 곧 서른을 눈 앞에 둔 여자사람으로서, 이 사회의 눈총을 견뎌내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영화를 한다는 소개 뒤엔 알 수 없는 묘한 걱정이 뒤섞였고, 어디서부터 내 선택이 꼬이기 시작했을까 스스로를 자책하고 비난하게 됐다. 그렇게 나는 세상을 향해 비겁하게 외친 OK가 많았고, 나의 첫 영화는 NG 였다.
7. 하던거나 하세요.
"너나 잘하세요".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명대사를 던지고 싶었던 순간이 많았다. 먼저는 고등학교 때였다. 나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서도 전국 글쓰기 공모전에 글을 내고 입상을 했다. 최우수상, 우수상, 장려상, 이런 순위 아닌 순위가 매겨지는 공모전이었지만 나는 '입상'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전국'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희망이었다. 이제 나도 글을 써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런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일었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공부나 하지 쓸데없는거나 한다면서 오히려 교무실에서 혼이 났다. 그 때 그 모습을 본 국어 선생님은 나를 조용히 복도에 불러세워 어깨를 두어번 토닥여 줬다. 참았던 눈물이 슬리퍼 위로 또르르 떨어지는게 선명하게 보였다. 보통은 눈물이 나면 눈을 감아버리곤 하는데, 그 땐 오기가 생겨선지 눈도 감기지 않았다. 아마 화가 나서 눈이 감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성인이 된 후에도 종종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앞으로 뭐할거냐는 문제로 나와 입씨름을 하는 어른들이 많았고, 어떤 친구는 자기 집은 돈이 많아서 너처럼 자잘한? 기자단 원고료를 보자니 노동에 비해 개고생이라는 말까지 던지곤 했다. 그 후로는 멀쩡한 작가일 관두고 쌩뚱맞게 영화라니. 나중엔 그런 나를 보면서 '멋있다'가 아니라 '멋없다'는 말까지 들었다. 나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 사람이 정말 멋없음을 느꼈다.
7. 감독님 이럴꺼면 영화찍지 마세요.
너무나 칼날같은 이 한 마디. 직접적으로 나에게 내뱉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한 번쯤 나를 보고 품었을 이 한 마디. 그럼에도 내가 계속 영화를 하는 이유?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는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전부 실패를 안고 살아간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든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든 실패자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실패를 했을지언정 패배를 하진 않는다. 내 어린시절 일기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보단 내일이, 내일보단 1년이, 그리고 10년이 더 괜찮을거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5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영화를 쓰고 찍는다. 여전히 어딘가에선 감독님! 이럴꺼면 영화찍지 마세요!라고 흥분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는 것. 이젠 가..암 작가님이란 이상한 별칭대신 이렇게 불린다. 감독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