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괄식으로 말하자면 호랑이해 호랑이띠의 나는 2022년을 절대 잊지 못할 거다. 이 나이 먹고도 참 단순하게도 호랑이의 해니까 호랑이띠인 내가 좀 대박 나려나! 생각을 했었는데 그건 내 과오였다.
전년도 12월의 성과가 1월에 드러나는 순간부터 일에 대한 슬럼프가 왔다. 내 업무시간을 넘겨가며 당시의 방역 방침에 따라 격일로 한 번쯤은 콧구멍에 검사용 면봉을 찔러 넣어가며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하루 12~13시간씩 일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팬데믹이라는 전 세계의 시국 자체로 원인이 돼서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지만 나는 오로지 내 탓만을 했다.나를 믿고 함께 열심히 해 준 직원들에게 미안함이 컸고 뭣같이 고생했지만 성과급 한 푼, 돈을 떠나 성취감조차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 연말과 신년을 겪는 우리들의 분위기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경영을 담당하는 최고 관리자였던 나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새해를 맞이한 1월부터 2월까지는 내 생애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으로 입맛이 없어 잘 먹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면역력은 현저히 떨어졌고 2월의 어느 날 새벽,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눈앞이 핑 돌며 쓰러져 아주 잠시 의식을 잃었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라 아무도 내가 쿵하고 쓰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나는 욕실 타일에 얼굴을 박고 고꾸라져 있었다. 얼른 일어나 거울을 봤더니 세상에.. 입술은 찢어져서 피가 뚝뚝 흐르고 앞니 두 개가 깨져있었다.
나는 왜 그 와중에도 ‘오늘 내가 출근을 해야 하던가? 아 휴무지 다행이다.’ 하는 생각을 한 건지. 지금 생각해봐도 미련하게 책임감만 강한 사람이었다.
누구를 깨워서 응급실을 가거나 그럴 힘도 없어 피만 대충 닦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아침까지도 일어나질 못 해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병원을 갔는데, 의사 선생님의 말로는 다행히 신경에 문제가 생기지 않아서 앞니가 깨진 부분만 레진으로 씌울 수가 있다고 했다. 그때 치과 진료실에 누워서 별별 생각을 다 한 것 같다.
입사하고 처음으로 휴무인 그날을 제외하고 이틀 정도 병가를 내고 가만히 누워 천장만 보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멍 때리는 순간도 필요하구나,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밖에 없구나, 나 자신도 돌보지 못하면서 누구를 생각하고 배려해, 나부터 챙기자.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3일이 지나갔다. 내 업무가 쌓이면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그 이상을 쉴 수도 없어 출근을 했고 온전하지 못한 컨디션으로 업무 시간을 소화하다가 또 사단이 났다. 쓰러진 후 일주일 만에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밀접접촉자로 3월 2일 새벽부터 증상이 시작됐다. 목이 아프고 기침이 심했다. 서비스직 종사자기 때문에 거의 매일 자가 진단키트를 이용했는데 전날까지도 자가 진단으로는 음성이었다.
그래도 밀접 접촉이고 증상이 있으니 PCR을 받아야겠다 생각하고 선별 진료소에 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과로로 면역이 저하되어 감기가 왔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보건소 연락을 따로 받지 않았고, 밀접접촉자의 동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PCR 검사를 진행할 수 없다고 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에 동의했던 게 참 아쉽게도 내 증상이 시작된 전날인 3월 1일부터 바뀐 지침이라고 했다.
보건소로 갔지만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나는 보건소 관계자에게 힘없이 물었다.밀접 접촉이고 증상이 있는데도 왜 검사 대상이 아닌지, 방역 패스도 해제된 상황에 확진 판정을 받은 친구에게 관할 보건소의 역학 조사가 있었는지를 물었을 때 그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보건소 연락을 내가 어떻게 받느냐고. 그럼 내가 검사 거부를 당하고 후에 확진 판정을 받으면 그 파장은 누가 책임지기나 하냐고.
나만 아프면 상관없는데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내 직업은 그게 아니지 않냐는 생각에 한 말이었다.
나의 물음에 관계자는 다른 말없이 신속 항원으로 양성이 나오던가 아니면 병원 가서 본인 부담금 8만 원을 내고 검사를 받으라고만 했다. 대체 왜? 이건 나만 이해가 안 된 건가...
일단 하라는 대로 신속 항원 검사를 했지만 보건소 사람들은 자가 진단키트로 스스로 하는 나보다도 대충 검사를 진행했다. 당연히 또, 음성으로 나왔다.
당시엔 워낙 확진자수가 많기도 했기 때문에 이분들의 노고를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서 늘 역학 조사 때 바쁜 와중에도 성의껏 답변드렸는데..) 지침을 들먹이며 환자가 아닌 그저 개미 떼 같은 사람 중의 한 명으로 대하는 무미건조한 태도가 내 입장에선 확실하게 코로나 걸려서 오라는 말로밖에 안 들렸다.
내가 이런 감정을 가져야 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서운하고, 속이 상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내 상태는 최악이었다. 첫 증상이었던 목 아픔과 기침은 물론이고 오한과 발열로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결국 내가 다니던 내과를 찾아갔다. 접수할 때 증상을 이야기했더니 따로 대기하게 했고, 간호사 선생님께서 신속 항원 검사를 먼저 해주셨다.
그런데 달랐다. 보건소에서 대충 하던 그 검사와 똑같은 검사인데도 마치 다른 검사처럼 느껴질 정도로 환자를 배려하며 확실하고 신속하게 해 주셨다. 결과는 양성. 그때 열이 38.3도였다. 선생님은 백신 3차까지 맞고 열이 이렇게 높은 경우는 처음 본다고 하셨다.
"아니 너무 아파 보이는데? 곧 쓰러질 거 같은데, 그냥 보기만 해도 양성 나올 거 같은데 PCR을 못 받아서 어떡해요. 소견서 줄 테니 얼른 가요. ○○○병원으로 가야 결과가 빨리 나와요."
나는 의사 선생님이 써주신 소견서와 처방해 주신 약 봉투를 들고 PCR 검사를 (드디어) 받게 됐다. 대기 줄이 너무 길어서 기다리는 내내 주저앉는 나에게 누가 톡톡 어깨를 건들더니
"학생,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내가 순서 되면 말해줄 테니까 저기 대기 줄 맨 앞 의자에 앉아있어요."
진짜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인류애 상실한 것 같던 때에 최고의 따뜻한 경험이었다. 그분 덕분에 나는 앉아서 대기하다가 무사히 문진과 접수, 검사까지 마칠 수 있었다. 너무 감사해서 계속 고개 숙여 인사드렸다. 그리고 전국에서 결과가 제일 빨리 나온다는 병원답게 검사를 받고 몇 시간 후 확진 판정 연락을 받았다.
내가 겪은 코로나 증상을 표현해 보자면 이렇다.
목구멍은 마치 작은 존재가 내 목 안에서 활을 쏘고 있는 듯 따갑고 기침 때문에 가끔 숨이 찼다. 고열 때문에 이불속에서도 느닷없이 몸이 벌벌 떨리고, 눈알이 빠질 것 같고, 해파리떼가 내 몸 전체를 쉴 새 없이 쏘아대는 것처럼 따갑다 못해 아팠다. 두통은 말도 못 했다. 내가 평소 두통을 잘 겪지 않는 사람이라 그런지 망치로 내 머리 뒤를 가격해서 그대로 깨지는 것 같고, 그게 반복돼서 죽을 것 같았다. 추가로 입술엔 꽤 크게 포진도 생겼고, 생리주기는 한결같이 칼 같은 내가 생리 예정일이 됐는데도 생리가 없었다. 나는 내 몸의 이상을 호르몬으로 읽는 편이고 몸 상태가 최악일 때 생리주기가 틀려지는데 이때 딱 그랬다.
무증상이거나 증상 가운데 몇 가지만 겪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나는 진짜 그 증상 가운데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겪는 '가지가지하는'사람이었다. 여기서 꼭 하고 싶은 말은 나도 이렇게 가지가지하는 사람이 될 줄 몰랐다는 거다.
집에서도 소독을 수시로 하고 강아지와 고양이들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생활했다. 코로나가 뭔지 알 턱이 없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은 내가 집에만 있으니 좋아서 자꾸 누워있는 내 옆으로 다가왔는데, 혹시 모르는 일이라 보호 차원에서 아이들을 밀어내려니 마음도 찢어질 듯 아팠다.
격리 3일 차 정도부터는 후각과 미각을 잃었다. 냄새가 1도 안 나고 맛도 안 느껴졌다. 씻지도 못하고 억지로 밥을 먹고 약 기운을 빌려 겨우 잠드는 것밖에 못 하던 나에게 누군가는 시간이 좀 지났으니 괜찮아졌을 거라는 경솔한 판단을 하고 '이참에 좋아하는 독서 하면서 쉬라'는 말을 했다. 내가 휴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정말 말 그대로 격리 중인데 말이다. 말이 쉬워서가 아니라 정말 아파 죽을 것 같은데.. 불같은 내 성질에 화낼 힘도 없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힘든 격리 중에 3월 9일이 다가왔다.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 선거날이었다.
코로나 확진자로 참여하는 대선이라니.. 확진자들은 당일 외출 허용 시간을 5시로 정해놓고 6시부터 따로 투표 진행을 했다. 그래, 아파 죽겠어도 이건 해야지. 마스크와 장갑을 겹겹이 쓰고, 끼고 꽁꽁 싸매고 나와서 나의 한 표를 보탰다. 그렇게 자가 격리자로 국가가 허용한 일시적 외출이라는 특이한 경험을 했던 나는 일주일 간의 격리 기간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힘들었다. 후유증도 꽤 오래가서 내 몸을 코로나 확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팬데믹의 스트레스로 면역력을 잃고, 바이러스를 몸소 겪은 나의 그때 유일한 바람은 잃어버린 미각과 후각을 찾아 혓바닥이 뒤집어질 정도로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거였다. 그게 다였다.
일상에서 평범하게 있던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다 귀하게 느껴졌고, 한번 세게 아프고 나니 알게 됐다. 안일할 일이 아니라는 것, 코로나는 그렇게까지 무섭고 아픈 일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어딘가에서 묵묵하게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영화 <남극의 쉐프>의 엔딩, 남극에서의 긴 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 남극의 쉐프 니시무라는 이런 말을 한다. 당연한 듯이 물을 쓰고 당연한 듯이 외출을 하면 어쩐지 더 혼란스럽다고.
이 시국의 내가 2009년에 제작된 영화의 엔딩 대사에 이렇게나 공감되고, 감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연한 말로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그 후로 나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 나에게 내일이 당연하지 않기에, 그저 오늘을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내게 오늘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나를 돌보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