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14, Okinawa.
나는 이제 오키나와라고 하면 더 이상 해변가의 푸드트럭이나 대관람차가 있는 아메리칸 빌리지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과 장소, 장면만이 떠오른다.
전부터 오키나와를 가고 싶어 했던 나는 오키나와에 관한 책자를 사 읽곤 했는데, 얼마나 가고 싶었던지 오키나와라는 키워드로 음악 검색까지 한 적이 있다. 그렇게 92914라는 밴드의 <Okinawa>라는 곡을 알게 됐다.
밴드 멤버들이 실제 오키나와에서 머무르며 쓴 곡이라고 하는데 잔잔한 바다와 바람이 그대로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아서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두고 평소 자주 듣는 곡이었다.
나는 그랬지만 주변에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뿐더러, 어딜 가서 이 곡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 사람과 데이트가 있던 어느 봄날이었다.
커피 한잔하면서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했던 우리는 맛있는 커피집을 여러 군데 골라두고 만날 때마다 차례차례 방문했다. 보통은 그 사람이 적극적으로 알아보곤 했는데 선택지가 항상 만족스러웠고, 그게 뭐라고 우리 둘은 그런 잔잔한 데이트를 즐거워했다.
그날 처음 방문했던 작은 커피집도 그 사람이 고른 곳이었다. 밖에서 안이 훤히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즐겨 듣던 그 노래가 들려왔다.
Look at those trees
Look how they move by the breeze
Look at those stars
Look how they shine through the night
"이거 내가 좋아하는 노래잖아!"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볼륨 조절을 하지 못하고 외친 말에 사장님은 "크게 해 드릴까요?" 하셨지만 왠지 민망했던 나는 조금 전의 패기 넘치는 톤과 달리 조그맣게 괜찮다며 쭈뼛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네 사장님.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릴게요." 하고 정중하게 말씀드렸고 곧 그 작은 공간에서 담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것처럼 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내게 시선을 돌려 눈웃음을 지어 보이던 사람. 공간에서 들리는 음악과 현장의 소리를 중요시하는 나를 잘 알고 있던 그 사람의 배려에서 나오는 오지랖이었다. 어쩌면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던지.
우리는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커피도 매번 다른 종류로 한 잔씩 주문해서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 누군가가 입술을 댄 컵을 같이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런 편안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커피를 마시는 내내 <Okinawa>가 흘러나왔다. 터프한 외모였지만 사실 아주 다정했던 사장님의 배려였다. 반복해서 들리는 노래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의 눈빛을 보내며 흐뭇해했다.
오키나와의 분위기를 담은 노래가 쉴 틈 없이 흘러나오는 동안 우리의 입도 쉴 틈이 없었다. 살면서 누군가와 이렇게나 대화를 해봤을까 싶을 정도로 그 사람과 나는 만나는 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통 어딜 가든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편인데 그 사람을 만나는 날에는 유난히 휴대폰을 가방에만 넣고 다녔다. 사진을 남길 생각을 못 할 정도로 그 사람과 함께 있는 1분 1초를 놓치기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긴 사진이 많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다. 남은 사진은 미련과 비례하는 것 같아서.
노랫말처럼 우리는 종일 걸으며 나무들이 어떻게 바람을 타는지 보았고, 별들이 어떻게 빛나는지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같이 밤을 보냈다.
그날의 기억은 내게 <Okinawa>라는 곡이 전하는 다양한 느낌으로 남았다. 고요하고, 따뜻하고, 평안했다. 자연에게서만 얻는 그런 기분을 주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출근하는 길이 달라진 요즘의 나는 함께 걷던 길을 아침저녁으로 다녀서 그런지 그 사람이 자꾸만 떠올라서 매일 <Okinawa>를 듣는다.
서로가 그렇게 소중했고, 서로에게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
그 사람과 나는 왜 그리도 성급하게 헤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