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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의 순기능.

낭랑 18세 나의 담임선생님은 문학선생님이었다.

by 김커피

내 전화번호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줄곧 바뀌지 않고 그대로다. 한때는 스마트폰에 비하면 다소 두터운 폴더형 2G 폰으로 문자메시지를 아껴가며 사용하던 내가 있었는데 시대는 빠르게 변해갔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문자 대신 카카오톡이라는 무료 메신저를 이용하게 됐다. 이 메신저는 한 통 보낼 때 꾹꾹 채워서 할 말 다했던 문자와는 달리 데이터 사용만으로 한도 없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메신저의 의미 있는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오죽하면 "아주 짧게 ㅋ 한 글자만 찍어서 보냈다" 대중가요에서 이런 노랫말도 있겠는가.


개개인의 프로필을 설정하고 사용하는 카카오톡은 내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어 있던 오래된 번호의 주인들이 내가 알던 그 사람들이 맞는지를 확인할 수도 있게 했다. 그런 점은 가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바쁜 시대에 연락하고 지내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연락이 닿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최근 옛날 필름 사진과 지금까지 모아놓았던 편지함을 구경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의 찐한 추억을 마주했다. 보통은 예비 수험생으로 대학 입시 걱정하느라 바쁜 고2 때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놀았다. 방송부 프로듀서로 활동하던 때라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자율학습 시간에 친구들이 문제집을 풀고 있을 때 방송해야 할 원고를 쓰거나 시집을 읽곤 했다. 가끔은 방송실에 가서 혼자 비디오를 보거나 음악을 듣기도 했다. 보기엔 평범한데 워낙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로운 영혼이라서 선생님들께 특이한 학생으로 보였지만, 교무실에서 나를 모르는 선생님이 거의 없을 정도로 사랑도 많이 받았다.


낭랑 18세 나의 담임선생님은 문학선생님이었다. 무뚝뚝하면서도 선한 눈빛의 담임선생님을 좋아해서 잘 따랐고, 존경했다. 반 아이들끼리는 항상 "백샘"이라 불렀다. 백 씨 성을 가진 분이기도 했지만 백점 선생님이기도 했으니까.

가을쯤이었을까. 곧 수험생이 되는 2학년은 담임선생님께 번호순대로 상담을 받았다. 그냥 입시에 관한 상담일 뿐이었는데도 친구들은 상당히 긴장하고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 김 씨였던 나는 제법 빨리 상담을 받게 됐다.


조용한 휴게실에서 선생님과 나 둘만 마주 보고 앉아 상담이 시작됐다.

선생님은 내게 나중에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냐고 물으셨다. 나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당시 내가 방송부 일을 하면서 키운 꿈, 라디오 작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은 나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주영아. 나는 여태 교직 생활하면서 너처럼 목표가 뚜렷하고 주관이 확고한 애는 처음 본다."

그래요? 그런가? 갸우뚱하며 웃는 내게 한 마디 덧붙이셨다.

"그런데 선생님 같으면 있지. 네가 하고자 하는 것이 그렇게 뚜렷하면 지금 하는 공부에 좀 더 집중을 할 것 같아. 네가 지금 최선을 다해야 나중에 후회할 일도 없고, 기회도 더 많아질 거야."

녹다운. 그렇다. 나의 KO패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인생 최고의 상담시간이었다.


긴 상담 이후로도 학업보다 이외의 것들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았지만 나름대로 조금 더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때에 시를 써서 교내 시화전에 내놓아도 선생님은 응원의 말을 빼놓지 않고 해 주셨다. 학년 내내 담임선생님의 사랑과 응원을 받고 나는 어느새 열아홉이 되었다.


수능시험에 자신이 없어 내신 성적으로 수시 지원을 했고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더 많은 학교에 지원해 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매일 피로에 찌들어 있는 수험생들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생각 없는 듯 밝은 얼굴이었다.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면 듣기 방송을 틀기 위해 방송실로 가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제외되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부러워했고 미리 "대학생"이라 불렀다.


학년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반 친구들끼리 롤링페이퍼를 써서 돌렸는데 내가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너무 좋아하는 걸 알았던 아이들은 그 종이에다 선생님의 편지까지 받아주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눈물 많기로 소문이 났던 나는 편지를 보다가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백샘은 문학선생님답게 문학적으로 내게 기쁜 슬픔을 안겨주셨다.



주영아, 합격을 축하한다.

소신 있게 너의 길을 찾아가는 걸 보니 대견스럽게 느껴지는구나. 너 가는 길에 용기와 열정과 인내가 항상 함께하길 응원하마.

열심히 살아가거라. 그동안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또 서로 기쁨이 되기도 했던 친구들, 선생님들..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오래 잊지 말거라. 많은 기쁨을 내게 주었던 너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던 내가 급식비를 내지 못해서 급식소 게시판에 명단이 붙을까 봐 전전긍긍할 때 지갑에서 급식비 몇 만 원을 꺼내 쥐여주셨던 나의 선생님.



사진과 편지가 든 상자를 열어 천천히 보다가 제주도 수학여행 때 선생님과 단 둘이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우도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건데 사진 속 선생님과 나는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나이였기에.


나는 오랜만에 카카오톡 프로필을 찾아보았다. 백샘이라 저장되어 있던 선생님의 번호는 프로필로 유추하건대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얼른 메시지를 보냈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답장이 왔다. 선생님은 20년 전의 왈가닥 제자를 잊지 않고 계셨다. 그리고 카카오톡이라는 게 이렇게 인연을 이어주는 걸 보니 놀랍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쓸데없는 말이 난무하는 카톡방, 단톡방 이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조금은 냉소적으로 생각하던 나는 그날 이후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렇게 카카오톡의 순기능 덕분에 20년 전의 제자와 담임선생님의 재회가 곧 있을 예정이다. 나는 바라던 대로 내 공간을 가진 사장이 되었고 나름 본캐와 부캐도 가졌다. 선생님께 맛있는 것을 대접할 능력이 있으니 그 옛날 급식비를 엄마 대신 내주셨던 선생님께 이제 내가 보답할 차례다.

20대가 되어 술을 마실 수 있을 때 선생님을 찾아뵙고 막걸리 한잔을 하며 대화를 나누었던 날처럼 내게 풍요를 줄 그 시간이 벌써 기다려진다.



무뚝뚝하면서도 선한 눈빛의 담임선생님을 좋아해서 잘 따랐고, 존경했다. 반 아이들끼리는 항상 "백샘"이라 불렀다. 백 씨 성을 가진 분이기도 했지만 백점 선생님이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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