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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기증 신청의 결정적 이유.

왜 주는 것은 받는 것 이상으로 기쁜 걸까?

by 김커피

나의 소중한 구름이가 떠난 지 3개월이 가까워 오고 있다. 수개월이 지나오는 시간 속에서 구름이가 옆에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매일 같은 이불속에서 자던 아이가 손을 뻗으면 바로 닿는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것, 새벽에 자다가 습관적으로 내 오른쪽을 더듬거리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누군가가 없는 빈자리라는 것. 나는 매일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몇 번씩 깨는데 자다 깬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다 깬 사람처럼 번뜩 눈을 뜨는 새벽마다 상실감을 느꼈다. 구름이의 부재는 그렇게 내 삶을 흔들고 있었다.


구름이가 떠나던 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이 끝난 아이의 유골을 확인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게 그리도 큰 존재인 아이의 유골이 하찮을 정도로 작아서 슬픈 것도 있었지만 화장 담당을 하시는 분이 하신 말씀이 더 아프게 새겨졌다. 하얗다기보다는 밝은 아이보리에 가까운 유골 가운데 확실하게 까맣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검은 부분이 있었는데 담당자분이 말씀하시기를 부분은 구름이가 아팠던 곳일 거라고 했다. 물론 추측컨대 그렇다는 이야기겠지만 시커멓고 조그만 그것을 보는데 내 속 한가운데가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로 우리가 메신저로 사용하는 이모티콘 같은 불씨 하나가 내 마음을 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20년 정도 장수한 노견이 아픈 곳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구름이는 우리 곁을 떠나는 날까지 죽음의 전조 증상을 보인 것 말고는 딱히 아픈 곳은 없었다. 지병이 있던 것도 아니고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때가 온 노견의 자연사였다.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전날에도 먹을 것을 잘 먹었고 물도 잘 마셨다. 내 옆에 누워있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예쁜 변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떠날 때까지도 구름이는 그저 잠든 것처럼 포근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타버린 재 같은 구름이의 유골 한 부분은 렇질 못했다. 그것은 마음속 응어리가 되어 나를 마구 찔러댔다.

아프면 아프다고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냈을 거라고, 노견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위안의 말을 스스로에게 하면서도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말 못 하는 동물, 특히 충성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강아지의 보호자는 시커먼 그 부분이라도 대신 아팠다면 하는 비현실적 생각뿐이었다. 이미 떠난 아이의 속을 본 것인데도 그렇게 사무칠 수가 없었다.


날마다 더해지는 그리움에 밤낮으로 구름이의 사진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구름이 같은 아이들을 도울 수는 없어도, 아픈 존재를 위해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그렇게 떠올린 첫 번째가 장기기증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퍼뜩 용기가 안 나는 거다. 다 성인이 돼서 누구의 의견일랑 필요 없이 내가 그러고 싶다면 그럴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만에 하나 내가 먼저 떠날 경우에는 식구들 특히 외동딸만 의지하고 살고 있는 엄마가 쉬이 허락할 문제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민한다고 해서 내 의사가 달라질 것은 아니었기에 어제 한국장기기증조직원에 장기기증희망등록을 하고 등록번호를 받았다. 아직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이미 도움을 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 주는 것은 받는 것 이상으로 기쁜 걸까?


엄마에겐 등록을 한 바로 다음날인 오늘 말했다. 마치 "엄마 내일 비 온대." 하고 일상 이야기를 하듯 덤덤하게. 혹시 딸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내가 희망하는 사안이니 엄마는 고민 없이 동의해 달라고. 엄마는 "설마 니가 먼저 죽겠나." 하면서도 딱히 반대도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구름이는 내게서 사라졌지만 그 부재로 인해 나는 삶과 죽음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딱 하루 쉬는 날에 맞춰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있는지도 자원봉사포털을 통해 계속 찾아보는 중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읽은 책의 문장을 읽은 순간부터 매일 되새긴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죽음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 것. 가슴 한켠에 저마다 깊은 슬픔을 묻고 사는 존재라는 것도.

황선우·김혼비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중에서



차근차근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뭐든지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내가 겪은 아픔도, 타인의 슬픔도 모르는 척하지 않기 위해, 늦었지만 더 늦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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