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지면 생각나는 국물맛이 있다. 서울에서 자취할 때 종종 가던 곱창집에서 무려 서비스로 주던 선지해장국. 작은 뚝배기 가득 펄펄 끓여 나오는 그것이 먹고 싶어 곱창집을 찾곤 했던 겨울의 기억. 이렇게 추운 날엔 그 맛이 꼭 그리워진다.
연휴와 겹쳤던 올해 내 생일에는 혼자 여행을 갔다. 바닷가의 호텔에 2박 예약을 하고 호캉스를 떠난 것이라 여행이랄 것도 없었지만 이틀 동안 마음 정화도 하고 새 친구도 사귀게 된 좋은 시간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들어간 내 숙소는 고층에다 넓은 유리창 너머 바다가 시원하게 보였다. 버스를 타고 가서 택시로 갈아타고 이동했던 터라 피로가 몰려와 일단 잠시 침대에 누워 멍 때리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바닷가를 좀 걸으려고 나갔는데 연휴라 그런지 해변가에는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이 보였다. 해변가의 돌들처럼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즐기고 있는데 나는 오롯이 혼자였다.
미루지 않고 계획적으로 일하는 스타일과는 다르게 여행 스타일은 발길 닿는 대로 가는 편이라 이외의 다른 생각은 없었지만 딱 하나, 이 여행에서의 첫끼는 정해져 있었다. 바로 선지해장국! 숙소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유명한 해장국집이 있어 첫끼로 무조건 해장국에 소주를 마시는 일정을 마음속으로 정해뒀었다.
물멍을 하다가 미리 봐뒀던 해장국 사진을 떠올리니 군침이 돌기 시작했고 얼른 지도를 켜고 파워워킹을 해서 해장국 집을 찾아갔다.
연휴라 그런지 자리가 꽉 차있고 일하는 분들은 정신없어 보였다. 제일 작아 보이는2인 테이블에 앉아 해장국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는데 둘러보니 해장국 집에서도 나만 혼자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장국에 소주를 마시는 사람도 나 혼자였다. 혼자 산다는 TV 프로그램도 오래가는 시대에 혼자가 뭐 대수인가, 맛만 좋으면 됐지.
나는 사실 선지를 좋아하는데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국물을 내는 선지의 역할은 좋아하지만, 선지 자체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퍽도 까탈스럽다.
선지를 안 먹는 사람들은 빼달라고 주문사항을 미리 말해주면 된다는 안내가 있지만 나는 꼭 선지를 넣은 해장국 그대로 주문하는데 그 이유는 선지가 들어간 국물맛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선지해장국물의 8할은 선지의 역할이라 생각하는데 기타 해장국과는 다른 그만의 시원함이 있다. 선지에서 우러난 묵직하면서도 깔끔한 국물, 얼큰하고 깊은 색을 띠고 있는 해장국은 색깔 그대로의 맛이었다.
그렇게 서른여덟 번째 생일날 저녁으로 선지해장국에 밥을 말아 소주 한 병과 함께 야무지게도 먹었다.
다음날 바다 주변을 걸어 다니다가 근처에서 북카페를 발견하고 커피 한잔을 하러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며 읽을 책 한 권을 사가지고 앉아 온전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북카페의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생일을 기념으로 혼자의 시간을 갖고 싶어 이곳으로 어제 여행을 왔고, 어떤 호텔에 묵고 있고 뭐 그런 것들을 말하다가 첫날 저녁으로는 무얼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사장님께 그 해장국집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곳에서의 일들을 이야기하다 당연스럽고도 자연스럽게도 책, 커피,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비슷한 성향까지 알게 되었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이는 내게 물었다.
"MBTI가 뭐예요?"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이에게 대답했다.
"저 ESFJ요. 그런데 I 같지 않나요? 낯 많이 가리는데."
무슨 그런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대답을 표정으로 대신하던 사장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I는 지금 이렇게 혼자 여기 와서 커피 마시면서 책 사가지고 읽지 않아요. 집에 가져가지. I면 나랑 이렇게 대화하기도 힘들고요. 결정적으로 I는 혼자 해장국집에 가서 소주 못 마셔요."
뭔가에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늘 내가 낯을 가리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지내왔다. 그런데 그날 알았다. 나는 낯을 가리는 게 아니라 사람을 가리는 거였다. 누구랑 말하는 건 쉽지만 아무랑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임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내가 낯을 가린다고 말했을 때 코웃음 치던 지인들의 마음도 이해하게 됐다. 이 모든 것을 선지해장국이 알게 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에도 나는 체크아웃을 하고 일부러 북카페에 들러 사장님과 인사를 하고 왔다. 38년 인생을 살아오며 첫 깨달음을 준 새 친구에게. 그리고 선지해장국으로 깨달은 성격만큼 까다로운 내 입맛에게.
그날 이후로도 나는 선지해장국을 사 먹으러 두세 번쯤 식당엘 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제는 선지 자체로도 잘 먹힌다. 이전까지만 해도 선지의 퍼석한 식감이 싫었는데 지금은 씹을수록 꼬숩고 그 식감이 내 예상보다 국물의 시원함을 방해하지 않아서 좋았다. 먹는 것 역시 마음가짐에 따라 다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