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커피 Jun 26. 2024

풀고 싶을 땐 짬뽕을 먹어

나쁜 속과 더불어 나쁜 기분도 풀 수 있는 중한 것

그대여~ 그대여~

비가 내려 외로운 날에 그대여~

짬뽕을~~ 먹자


황신혜밴드의 노래 <짬뽕>의 도입부 가사다. 짬뽕하면 항상 영화 <그놈은 멋있었다>에서 故 정다빈 배우가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부터 떠오른다.


노래는 전반적으로 남녀노소 불문 바람 불어 외로운 날에 짬뽕이나 먹고 풀자 이런 의미로 해석되는데 내게도 짬뽕은 매번 '푸는' 용도의 먹을거리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짬뽕으로 어떤 것들을 풀며 지내왔을까.


'풀다'의 사전적 의미는

1. 묶이거나 감기거나 얽히거나 합쳐진 것 따위를 그렇지 아니한 상태로 되게 하다.        

2. 생각이나 이야기 따위를 말하다.        

3. 일어난 감정 따위를 누그러뜨리다.


아마 내 삶에선 세 번째 의미로의 짬뽕이 대부분이었겠지 생각하다가 순간 뇌리에 박힌 짬뽕 한 그릇이 떠올랐다.



A라는 친구를 좋아했다.

A는 그냥 남사친인데도 남자친구처럼 나를 예뻐하고 귀여워해줬다. A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 B에게는 했다. B는 내가 A를 자신에게 소개해주었기 때문에 A를 향한 나의 마음을 눈치챘고 그와 관련해서 상담을 해주곤 했다. 그러니까 A와 B는 관계랄 것도 없었지만 굳이 관계성을 따지면 교집합으로 내가 있었을 뿐이다.


나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A가 나를 좋아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근거가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고 A는 늘 내게 그런 식이었다. "귀여워죽겠어. 네가 너무 좋아지면 어쩌지."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 앞에서는 못했어도 내 앞에서는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친구였다.


어느 날 A는 내게 이야길 좀 하자고 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오늘부터 1일인가 그럼? 김칫국을 벌컥벌컥 마셨는데. A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 그래. 올 것이 왔구나. 경솔하게도 속으로 이런 말을 하면서 뻔한 대답일 거라 생각하고 능청스럽게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로 "누군데?" 하고 물었더니 한참을 뜸 들이다가 B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뭐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고백받지도 못했지만 고백하지도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고뇌에 빠졌다.


나와 B가 속한 절친한 멤버들 사이에서 그 일은 이슈가 되었지만 이성 문제로 우정에 금이 가는 것은 나도 싫어서 없던 일로 하자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는 중이었다. 그때 B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왜 네가 미안해. 나 괜찮아 정말."

상처받은 나 자신보다 내 친구가 걱정돼서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말하며 달랬었는데. 미안한 이유가 분명하게 있었다는 것을 후에야 알았다.


마음의 충격이 조금 가시고 나서 친구들과 걸어가다가 우연히 멀리 A와 B가 나를 보더니 한 사람은 마트 안으로 한 사람은 마트 옆 골목으로 줄행랑을 치는 것이 보였다. 어? 분명 두 사람이었는데... 왜 나를 보고 놀라서 도망을 가는 거지? 싸한 기분에 멈칫하며 말하는 나에게 함께 놀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쟤네 둘 사귀잖아. 한 3일 됐을 걸?"


우르르 쾅쾅. 내 머리 위로 천둥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우습게도 그 순간에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머릿속에 자동재생되었다.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내 친구에게 소개 시켜줬고...


그 밤에 나는 강소주를 마시며 펑펑 울었고 더 이상 짜낼 눈물이 없을 때는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 치며 김건모의 노래를 반복해서 불렀다.

그제서야 난 느낀 거야 모든 것이 잘못돼 있는걸 너와 내 친구는 어느새 다정한 연인이 돼있었지



미친 사랑의 노래는 딱 하룻밤으로 끝났다.


울다 웃다 마시다 잠이 들었고 눈을 뜬 다음 날 아침, 전날의 슬픔이고 뭐고 짬뽕이 딱! 떠올랐다. 떠오른 김에 벌떡 일어나 가까운 중국집에 가서 짬뽕을 주문했다. 친구인 나에게 배신 때린 그들을 생각하며 짬뽕 한 그릇을 때렸다. 탱글탱글한 면발과 해산물과 야채 건더기를 작은 입 가득 넣어 우걱우걱 씹어먹고, 얼큰한 국물은 강소주로 취기가 다 사라지지도 않은 내 속을 달래주었다.


내게 A를 소개받았던 B는 다 알면서도 A를 만났고 그 사실을 숨기기까지 했으나 친했던 무리와의 예의와 의리로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지내자 했지만 본인이 더 괴로웠는지 무리에서 먼저 빠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나의 연애상담을 해주는 와중에도 이미 뒤에서는 A와 감정교류를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던 거네! 게다가 A는 B와 그렇고 그러는 도중에도 내게 늘 하던 것처럼 한 시간씩 통화하면서 달달한 말을 건네곤 했다. 누가 더 나빴나 잴 것도 없이 둘 다 나빴다.



김건모의 노래처럼 내 사랑과 우정을 모두 버려야 했지만 내 기분을 풀기 위해서는 짬뽕 한 그릇이면 되었다. 뒤통수 맞은 것치곤 꽤 쿨하게, 마치 건더기를 다 건져먹고 난 후에 후루룩 들이키는 짬뽕 국물처럼 시원하게. 뒤돌아 볼 것도 없었던 그 관계는 끝이 났고 A와 B는 한 달도 못 가서 헤어졌다고 한다.


예전에 한 개그 프로그램의 코너에서 "열라 짬뽕나"라는 말이 유행어로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짬뽕은 모두에게나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나쁜 속과 더불어 나쁜 기분도 풀 수 있는 중한 것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