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에 나의 할머니는 시장에 도토리묵을 팔러 다니셨다. 아침 일찍이 나가 한 주는 여기 한 주는 저기, 큰 시장을 번갈아 다니며 도토리묵 장사를 하셨다. 그거라도 해서 살림에 보탬이 되려는 할머니의 뜻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싫어하셨다. 할머니가 팔다 남은 도토리묵이 밥상에 올라오기만 해도 짜증 내곤 하셨다. 탱글탱글 윤기가 흐르는 도토리묵은 맛만 좋았는데 말이다.
당시 할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하셨는데 새벽에 출근하면 다음 날 아침에 퇴근을 해서 하루 쉬고 다시 출근하는 격일 근무제였다. 머리털이 하얗게 센 할아버지는 출퇴근길 자리 양보도 없는 빼곡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아파트를 몇 년 동안 오가며 고생하셨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 할아버지의 휴무날이었다. 외출이라고는 하지 않는 할아버지가 집에 안 계시길래 볼일 보러 가셨나 보다 생각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할머니께 이야기를 듣고 부재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날도 일찍 시장에 나가 도토리묵을 팔고 계셨는데 무슨 일인지 거기까지 할아버지가 찾아오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봉투 하나를 건네고 말도 없이 뒤돌아 걸어가셨다고 한다.
시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던 검은 비닐봉지.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갑자기 사라지는 할아버지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비닐봉지 안에 있는 것을 꺼내든 할머니는 뭉클하기도 전에 기분이 좀 이상했다고 한다. 그 봉투 안에는 내의 세트 하나가 있었는데 그때는 내의를 입을 계절도 아닐뿐더러 할아버지께서 생전 할머니께 뭔가를 사주는 일도 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상한 기분은 할머니와 엄마와 나 사이에서는 그냥 일종의 해프닝처럼 이야기되고 말았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 그것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주 주말이었다.
엄마가 닭백숙을 만들어서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데 그날따라 할아버지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표현하자면 걸신들린 사람처럼 많이 드셨다. 워낙 닭백숙을 좋아하시는 분이라 맛있어서 그런가 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상 앞에 앉은 할아버지는 전날 저녁의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너무 못 드셨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다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셨는데 내가 집을 나오고 나서부턴 두통의 정도가 심각해져 할머니와 엄마가 검사를 위해 큰 병원으로 할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휴학을 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고 있던 나는 오후쯤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가 입원을 하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괜찮을 거야.' 속으로 기도하며 퇴근 시간만 기다리다가 퇴근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도착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병실로 들어갔는데 병원 침대에 앉아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계신 할아버지는 이미 내가 알던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애지중지하셨던 손녀딸을 못 알아보고 계셨다. 어떻게 하루 만에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걸까. 충격이 컸고 그날 밤 나는 잠을 못 이루었다. 그리고 잠 못 들었던 나와는 다르게 할아버지는 깊은 잠에 빠지셨다.
병원에서는 그 상태를 코마라고 했다. 수개월 동안 잠들어있던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작별인사 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행동을 한다는 말. 원체 미신 같은 말을 믿지 않는 나라도 할아버지 일을 겪고 나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할머니와 다음 계절까지 함께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젊은 날 한량이었던 할아버지를 만나 고생만 하고 살았던 할머니는 내내 할아버지를 미워하셨다. 갑작스럽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는 딱히 울거나 하지도 않으시고 내 눈에는 괜찮아 보였다.
그렇게 식구들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할아버지와의 이별 중이던 어느 날, 퇴근 후에 약속이 있어 집에 늦게 들어갔더니 할머니는 이미 잠들어 계셨다. 웅크리고 주무시길래 왜 저렇게 불편하게 주무시지 생각하고 할머니를 자세히 봤더니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꼭 안고 계셨다. 얼굴을 보니 울다 잠드신 것 같았다.
할머니는 안 괜찮은 거였다. 괜찮아 보인다는 것은 나의 건방진 생각이었다. 당신께는 미워도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사람은 오직 할아버지뿐이었던 것이다.
며칠 전에 엄마가 시장에서 사가지고 온 도토리묵을 먹다가 그때를 떠올렸다. 나라는 사람은 현실적인 생각만 하는 편이라 이룰 수 없는 뭔가를 바라지도 않고 헛된 꿈을 꾸지도 않지만 딱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작은 상 앞에 앉아 도토리묵을 먹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도토리묵을 팔러 다니던 할머니에게 냈던 할아버지의 짜증은 곧 사랑이었다는 것을.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것보다 해줄 수 없는 것이 더 많아 괜히 도토리묵에 한껏 성질만 부렸던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건넨 마지막 선물로 그 사랑을 보여줬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