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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Jul 10. 2024

박카스 때문에 어른이 되고 싶었어

괜찮아요. 다 잘 될 거고, 천천히 간다 해도 늦지 않아요.

껌을 딱딱 소리 내어 씹을 수 있거나, 커피를 어지러워하지 않고도 마실 수 있거나, 박카스를 한 병 다 마실 수 있겠지? 어른이 되면 그럴 수 있겠다 싶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즘이야 피곤할 때면 커피를 찾거나 초콜릿 같은 달달한 군것질 거리를 찾지만 내가 어릴 적에 어른들은 피곤하다 싶으면 꼭 박카스를 찾았다. 지금처럼 편의점이 있던 것도 아니고 슈퍼마켓 냉장고에서 박카스를 찾을 수 있던 시절도 아니라서 약국에 갈 일이 있을 때 한 박스를 사다 놓고 진짜 피로할 때만 꺼내 마시던 어른들을 본 기억이 있다.


누가 박카스를 마시고 있을 때면 옆에 꼭 붙어서 빤히 쳐다보았다. 마실 것의 종류가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 지금처럼 마시고 싶다고 당장에 마실 수 있는 그런 때도 아니었기에 어른들이 마시는 병음료의 맛이 너무도 궁금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며 하나같이 "이건 애들은 못 마신다. 크면 먹어라 크면." 말씀하셨다. 아니 이게 술도 아니고. 왜 커야 먹을 수 있는데? 혹시 비싼 거라서 나한테는 안 주려고 하는 건가? 반감이 생기곤 했다. 그 병음료의 이름은 박카스였다.


하루는 마당에서 박카스 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 있는 할머니를 보고 얼른 달려가 떼를 썼다.


"할머니 나도 그거 먹고 싶어."


할머니는 역시나 "이거는 어른들만 먹을 수 있는 거다." 하셨는데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박카스 병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시선고정하고 있는 나를 위해 한 손에 쥐고 있던 뚜껑을 흔들며


"그라믄 이 뚜껑만큼만 먹어 보는 거다. 알겠제?"


딱 뚜껑만큼 맛보는 것에 대한 약속을 얻어낸 할머니는 작디작은 병뚜껑에 진짜 몇 방울만 흘려서 내게 주셨다. 100ml짜리 박카스 뚜껑에 5ml쯤은 됐을까. 노란 액체 몇 방울만 먹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 한 색깔의 마실 것이었는데, 한 번도 마셔보지 못 한 그런 맛이었는데 뚜껑에서 박카스가 조금이라도 더 나오지 않을까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젖히고 입에다 빈 뚜껑만 털고 있었다.

그 후로도 몇 번쯤 할머니 옆에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뚜껑만큼의 박카스를 얻어먹었다. 그리고 아이답게 몇 번의 경험 후에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고등학생의 나는 딱히 공부를 하지도 않으면서 친구들과 모여 독서실을 다녔다. 독서실이라는 공간은 참 희한했다. 1인용 책상에 온갖 책과 필기구를 정리부터 하고 공부한답시고 책을 펼쳐놓고 연습장에 딴짓만 해댔는데도 피로감은 밤을 새워 공부한 사람처럼 금세 몰려왔다. 에라 공부 좀 했다 치고 휴게실을 찾았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이 주로 오는 독서실이다 보니 자판기에는 커피나 카페인이 함유된 음료를 팔진 않았다. 그럴 땐 독서실 아래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캔 커피를 마실까 냉장고 안의 음료수들을 쳐다보다가 박카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옛날의 감질나던 뚜껑만큼의 박카스가 떠올랐고 나는 냉큼 손을 뻗어 박카스를 골라서 계산했다. 그날 나는 박카스 한 병을 처음으로 다 마셨다. 뚜껑만큼의 박카스와 달리 꿀꺽꿀꺽 진짜 마시는 것처럼 마실 수 있어서 행복했다. 어른들이 왜 피로할 때  박카스를 찾는지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과연 에너지 드링크의 원조다웠다.



최근 지인이 내 가게로 박카스 한 박스를 사들고 왔다. 누군가를 찾아갈 때 음료수를 사들고 가는 정. 갖가지 비타 음료가 생겨난 후 박카스는 대체될 때가 많았는데 오랜만에 파란 박카스 박스를 보니 정겨웠다.

박카스 한 병을 꺼내 마시고 생전 처음으로 병에 붙은 박카스의 상세설명을 보았다. 15세 미만은 복용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어른들이 그렇게 박카스를 아꼈던 게 이런 이유에서였구나. 아까워서 아낀 게 아니라, 나를 아끼기 때문에 아꼈던 거구나. 번 정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그런 기억들 때문인지 지치고 힘들 땐 자연스레 박카스 생각이 난다. 박카스를 마실 땐 꼭 광고에서 나오던 노래를 듣는 것 같다.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냐

괜찮아 잘 될 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


주로 이렇게 힘을 주는 노래들이다.


우리가 박카스를 찾는 이유는 이런 연결고리들이 아닐까. 괜찮아 잘 될 거고, 천천히 간다 해도 늦지 않아.

지금처럼 다양한 곳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때가 아니었던 그 옛날의 어른들은 아마도 박카스를 마시며 위로받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소중한 한 병의 음료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피로감이 점점 느껴지기 시작할 평일의 중간날. 이웃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박카스 한 병씩을 선물해야겠다. 괜찮아요. 다 잘 될 거고, 천천히 간다 해도 늦지 않아요. 온 마음 다해 응원을 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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