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ing Partners.
그때 그 노래.
국민학생으로 입학해서 초등학생으로 졸업, 어려서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적 지위 변동을 겪은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순차로 겪고 있는 80년대 생이다.
나의 부모님은 어린 나이에 뜨거운 사랑을 했고 ‘나’라는 결실을 낳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별거를 시작했다. 하나로 존재하는 나의 양육에 대한 부담은 둘로 나누기 위해 그들은 서류상 엄연한 부부로 맞벌이를 했고, 그때부터 나는 엄마의 부모님께 맡겨졌다. 이제 막 머릿속에 생각이라는 것이 차기 시작했던 터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라고 불러야 하는 그분들에게 “왜”라는 의문을 가졌다. “나한테는 할아버지, 할머니인데 왜 ‘외’라고 붙여서 불러야 해요?” 하는 정말 엉뚱하고 쓸데없는 미운 여섯 살 식 의문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의문이 단순해 보였을지라도, 그분들에 대한 나의 해바라기 같은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부잣집 아들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던 할아버지는 나의 할아버지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지위를 얻고서도 한량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그만의 낭만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영화를 좋아해서 그 시절에 영화 제작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그대로 마치 만취한 사람이 현관에서 신발을 던져버리듯 벗는 것처럼 아주 쉽게 홀랑 날려버린 그런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할머니께서 굉장히 고생하셨고, 맡겨진 손녀딸은 당시 벌이를 하고 계시던 할머니가 아니라 한량 시절의 생활 습관을 버리지 못했던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단연 많았다. 그랬기에 내 유년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도 당연히 할아버지였다.
당시 지내던 집에는 레버 형식으로 몇 안 되는 채널을 변경할 수 있는 금성 텔레비전이 있었다. 레버를 돌리면 따닥따닥 소리와 함께 채널이 변경되는 것이 신기해서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가 반대 방향으로 되돌리는 행위를 종종, 혼날까 봐 몰래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엔 뉴스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드라마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 채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멍하니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 하루는 그 텔레비전 앞에 있던 할아버지께서 “김주영~”하고 북쪽에 가까운 고향 탓인지 특유의 억양으로 나를 부르셨다. 그리곤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노래가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았는데 그 곡은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로 된 노래였다. 다만 참 따뜻한 멜로디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때는 듣기만 하고 이런 표현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왠지 반짝거리는 것 같던 할아버지의 눈빛과 그때 그 노래는 내 기억 속에서 잊혔고, 나는 두 분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며 성장했다.
공부는 수업 시간에 내 기준으로만 적당히 하며, 음악을 듣는 것과 글 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려서 처음으로 가진 나의 꿈은 시인이었고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작가를 꿈꿨지만 목표가 뚜렷했던 것에 비해 노력은 덜하고, 낭만과 패기만 넘쳐서 교무실에서도 긍정적으로 유명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방송부원으로 지내며 아는 것이 많아지면서 조금씩 관심 분야도 달라졌고, 달라진 마음대로 입시를 준비해 예대에 입학했다. 나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저 내 힘으로 학교를 열심히 다니며 성적 장학금을 받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가족 중에선 누구보다 할아버지가 기뻐하셨다. 당신의 자랑과 사랑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하지만 장학금은 백 퍼센트 지원이 아니었고, 특수성이 있는 사립대학교의 학비는 우리 집 형편으로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게다가 서울의 집값도 어마어마했으니까. 나는 그 생각조차 어른들께 부담이 될 것 같아 혼자 휴학을 결정하고 일을 저지른 후 고향으로 내려와 학비를 벌 생각으로 시내의 큰 약국에서 전산과 보조 업무를 보는 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보통날이었다. 할아버지는 심한 두통을 호소하셨고 정확한 검사를 위해 대학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쯤 어머니께 연락을 받고 퇴근 후에 바로 그 병원으로 갔지만, 분명 아침식사도 같이 하셨던 할아버지께서 나를 못 알아보셨다. 하지만 정신없는 눈빛으로 내 손을 꼭 잡은 할아버지의 온기에서 마음이 전해졌다.
다음 날 코마가 왔다. 할아버지는 수개월을 고요히 주무시다가 편안히 숨을 거두셨다. 내가 상상도 못 했던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충격과 상실감이 스스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릴 적부터 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던 유일한 존재.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시고 조언해 주시던 분은 할아버지였다. 없어선 안 될 존재의 부재로 나는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상처를 안고 견디며 학업에 다시 집중했고,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팍팍한 도시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며 지내던 어느 겨울날, 집으로 가는 버스 안 라디오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번뜩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금성 텔레비전 앞에서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말씀해 주셨던 그때가. 나는 수험생 시절에도 없었던 집중력을 발휘해서 노래 가사에 귀 기울여 내가 들은 가사를 검색해보고 그제야 그 곡을 ‘아는 노래’로 분류할 수 있었고, 곧이어 힘들 때 찾아 듣는 ‘좋아하는 노래‘로 분류할 수 있었다.
패티 페이지의 ‘Changing Partners’라는 곡이었다.
이 곡은 30대 중반이 된 지금도 마음이 건조해질 때면 찾아 듣는 노래 중의 하나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할아버지도 내 곁에서 함께 듣고 계신지 마음으로 여쭈어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마음으로 말한다. 패티 페이지의 마지막 노랫말처럼.
“I will never change partners again.”
여전히 내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 나의 할아버지는 내게 최고의 파트너이자, 멘토며, 아버지라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세상에선 영원히 존재할 내 큰 사랑의 주인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