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지 못할 한라산 마셔나 본다.

한라산 소주 이야기.

by 김커피

나는 애주가다. 장기적인 음주 생활을 위해 운동을 하고 필요시 식단 관리를 하는 사람일 정도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술이라면 무조건 웰컴! 하며 마시는 편은 아니고 뭐랄까, 술다운 술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뭔가가 섞인 맛을 싫어하는데 내가 허락하는 섞인 맛은 소주와 맥주를 섞은 일명 소맥이거나, 보드카나 위스키 같은 도수가 높은 술에 토닉워터를 조금 타는 것뿐이다. 시중에 나와있는 술의 라인업 중 사람들의 즐거운 음주를 위한 무슨무슨 맛 소주, 무슨무슨 맛 맥주 같은 것들이 많이 있는데 나는 오히려 그런 섞인 맛에 약한 편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의 뜻은 과일이나 인기 있는 제품의 맛을 첨가했다던지 등의 주로 ‘단 맛’을 내는 술을 말하는데, 한 번씩 그런 술을 맛보고 나면 취기가 빨리 오르는 기분에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설명하자면, 술 취향이 확고한 편이다.

좋아하는 맥주와 좋아하는 소주가 나만의 순위로 매겨져 있어서 메뉴 선택 장애가 있는 나라도 술을 고를 때만큼은 고민하는 시간이 없다. 그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주는 섬에서 나오는 지역 소주, 제주의 ‘한라산’이다. 한라산 중에서도 파란 뚜껑의 21도를 좋아한다.


먹어보지 못했던 한라산에 대해서는 듣기로 소주 중에서도 센캐로 유명한 듯했다. 사람들이 주로 먹는 한라산은 21도의 그것이었으니까. 세다고 말할 만하다 생각했고, 그 센 술을 먹어보기도 전에 겁부터 먹었다.


그러다 미리 먹은 겁을 소화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갑자기 제주를 가게 됐는데, 그때의 나는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오로지 한라산을 마셔볼 생각뿐이었다.

제주에서 있었던 일정을 다 끝내고, 한라산을 마시기 위해 메뉴를 고르다가 숙소 주변의 흑돼지 집으로 결정했다. 흑돼지 오겹살에 소주 한 잔. 말해 뭐하나 싶었다.

초저녁이라 사람이 없는 고깃집은 더운 공기로 가득했다. 자리를 잡고 고기가 구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기를 먹기 직전에 한라산을 주문했는데, '첫' 한라산을 고기를 굽다 화력을 받아 미지근해진 상태로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툼한 오겹살 한 점을 먼저 먹고 냉장고에서 막 꺼낸 시원한 한라산 한잔으로 목구멍을 적시며 기름을 쓸어내렸더니 세상 행복이 그곳에 앉아있는 내게 다 쏟아진 같았다. 그래서 그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한라산을 내 입으로, 내 위로 쏟아부었다. 도수가 높은 소주 치고는 굉장히 깔끔하게 느껴졌다. 첫 잔에 이미 시작된 사랑이었다.

그 후로 술자리에 갈 때면 나는 습관적으로 가게의 냉장고부터 살피는 사람이 됐고, 스캔 결과 한라산이 있는 곳에선 한라산을 주문해 마셨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었으니까.


술 마시는 자리에 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내 체중은 급격히 불어났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듯한 모습으로 어느 날,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반가운 것도 반가운 거지만 친구의 눈빛이 이미 '너 왜 이렇게 커졌니?'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체중 증가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던 나는 "살이 많이 쪘지? 술을 배웠지 뭐야." 천연스럽게 말했다. 인사를 하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다가 제주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친구는 갑자기 제안을 했다.

"나랑 한라산 갈까? 한라산은 좀 빡센 곳이라 운동에도 좋을 것 같은데."

내 사랑을 거절하고 우정을 오래 지키고 싶다던 그의 입에서 변변치 않은 이유를 갖다 붙이며 한라산을 함께 가자고 하는 의도가 궁금지만, 단 이해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나는 정색할 마음도 없어서 "한라산 좋지. 오르지는 못해도 마실 수는 있거든? 마시는 한라산도 좀 빡센 편이야. 다음에 한잔하자." 표정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한라산 이야기는 꺼내보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렸다.


하지만 한라산의 정기를 품은 푸른 모습의 알코올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증발할 수 없었고, 물론 지금까지도 진행형이다.


한라산을 멋들어진 안주와 마시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김치와 과자만 앞에 두고 마시기도 한다. 중요한 건 안주가 아니라, 소주니까. 그때 그 친구가 어색하게 포장된 멘트로 함께 하자고 시도하는 것보다 그저 진심을 전하는 게 백 배 천 배 나았을 거라는 내 생각처럼 말이다.



세상 행복이 그곳에 앉아있는 내게 다 쏟아진 같았다. 그래서 그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한라산을 내 입으로, 내 위로 쏟아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