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 첫 축구는 작고 네모난 텔레비전으로 봤던 98년 프랑스 월드컵이다. 너무 어릴 적이라 단편적인 기억들만 남아 있지만, 확실히 축구라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동그란 공이 초록의 잔디 위에서 튀어 다니고, 그 공 하나를 위해 선수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인상 깊었다.
어떤 리그가 있고, 어떤 대회가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10대였지만 월드컵은 4년마다 돌아온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렇게 나는 2002년을 맞이했고, 축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을 이 공놀이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그때를 떠올리면 '내가 성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곤 하는데,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던 나이여서 더 괜찮았던 나만의 기억을 갖게 된 것 같다.
월드컵을 치르는 그 시기는 기말고사가 가까워지고 있던 때였다. 친구들은 방과 후 남는 시간에 독서실을 다녔지만 나는 당시 접할 수 있던 언론을 통해 최대한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 오빠들의 영상을 비디오에 녹화하고, 신문 기사나 사진을 스크랩하기 바빴다. 내가 얼마나 열혈이었냐면, 단골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축구를 안 본다고 하시길래 "월드컵인데 어떻게 축구를 안 봐요?" 당돌하게 굴다가 비디오 가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축구도 잘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좋아만 했기에.
2002년의 월드컵은 내게 축구 첫사랑을 남겼다. '진공청소기'라는 별명을 가진 김남일이었다. 고1 소녀답게 내 최애 선수와 친구들의 최애 선수가 등장하는 팬픽을 쓰기도 했다. 최애 선수가 겹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포인트로 축구선수처럼 우리만의 팬픽 포지션이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친 소설 속에서 우리는 마음껏 행복해했다. 그런데 너무 좋았던 나머지 사고의 1단계를 무작정 밟았다. 나처럼 심각하게 축구에 빠진 (혹은 축구선수에 빠진) 친구 몇몇과 작전을 짜고 집에는 독서실에 다녀온다 말하고 인천으로 떠났다.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로, 차비와 컵라면 사 먹을 돈만 겨우 챙겨서. 조별리그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인천 문학경기장 근처의 한 호텔에서 대표팀이 묵고 있다는 사실을 접수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던 때도 아니고, 인터넷 정보를 쉽게 이용할 수 있던 때도 아니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갔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시외버스를 타고 장장 5시간을 달려 인천에 도착했다. 좁고 딱딱한 버스 의자에 한참 앉아있었더니 엉덩이에 불이 나는 것 같았지만, 우리 대표팀 선수들을 볼 생각을 하면 그런 것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 가슴에 불이 불이 나는 듯했다.
만화 세일러문의 옷처럼 예쁜 세일러복이 아닌 라인 없이 일자로 떨어지는 세일러복을 입고 귀밑 3센티의 똑 단발머리에 복숭아뼈에서 5센티 올라간 양말과 검정 단화를 신은 고등학생은 누가 봐도 촌티가 났다. 호텔 앞에서 서성거리던 나와 친구들은 처량해 보였는지 주변에 계시던 많은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컵라면 이상의 든든한 끼니를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운을 먹는 데에 다 써서 그런지 결국 선수들은 볼 수 없었고, 그나마 선팅이 되어 잘 보이지 않는 버스 밖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만으로 "나 김남일 오빠 봤다!"라는 사실이 성립되었다. 그때의 나는 고1이었고, 이후에도 열렬히 사랑하다가 신문 1면에 난 스캔들로 인해 내 첫사랑 시즌은 막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소녀였다.
그렇게나 요란스러운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대학 생활을 하며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응원했다. 20대가 되니 보다 진지하게 축구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대표팀보다는 자국의 리그를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국내 프로축구인 K리그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내 마음이 정착할 팀 '전북 현대'를 만났다.
학교 생활을 하고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사회인이 될 때까지도 서울에서 여기저기 직관을 다니면서 가본 경기장 목록을 서서히 늘리고 있을 때였다. 2002년의 그날처럼, 너무 좋았던 나머지 수도권 원정을 온 우리 팀이 머무른다는 호텔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 호텔이 집에서 가깝기도 했고 먼발치서나마 보고 싶었던 마음에 호텔 밖에서 기웃거리다 우연히 당시 팀의 수장이었던 감독님을 뵙게 됐고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때의 감독님은 관중이 많지 않은 K리그, 그것도 수도권도 아닌 전라도를 연고로 한 팀을 보러 와주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항상 다정히 대해 주시는 걸로 유명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떨고 있는 내게 감독님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물으셨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고, 감독님과 팬으로의 인연도 시작됐다.
언젠가 그런 적이 있었다. 축구 관계자분들이 모인 자리였는데 그때 감독님은 나를 이렇게 소개하셨다.
"이 친구는 경상도 사람인데 서울에 살고, 전북을 응원하는 친구예요."
짧고 굵은 감독님의 소개법은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모두가 나를 보며 신기해하며 웃었고,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말투와 표정으로 "뭐야? 뭐하는 사람이에요?" 묻는 분도 계셨다.
창원에 내려오기 전까지 축구와 관련한 자리가 있을 때면 스스로 그렇게 소개하곤 했다. 그럴 때면 위트 넘치는 입담으로도 유명했던 감독님은 이렇게 받아치셨다.
"창원 사람이니 경남 FC를 응원하라고 해도 싫다 그러고, 서울 살고 있으니 FC서울을 응원하라고 해도 싫다 그러네 이 친구는. 그냥 전북이 너무 좋대. 이상한 친구야."
그도 그럴만한 게, 난 서울에 있을 때나 여기 창원에 있을 때나 진정한 의미의 '홈경기'란 경험해 볼 수 없는 사람이니까. 홈인 전주도 원정을 떠나야 하고, 원정인 타 지역들도 원정을 떠나야 하는 역마살 축구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누가 봐도 이상한 친구 김커피는 전북을 응원해온지가 16년째다.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고, 그만큼 자주 울고 웃었다. 슬퍼도 울고 기쁘면 더 우는 나는 여전히 직관의 맛을 아는 사람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 이곳 창원에서는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 매번 마산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전주를 간다. 축구를 보러 다니며 쓴 교통비와 숙소비만 모았어도 결혼 자금 정도는 모였겠지만, 축구와 전북이 내게 준 추억은 값으로 매길 수도 없기에 전혀 아깝지 않다. 돈은 벌면 되지만, 추억은 살 수 없지 않나. 아마 이런 식으로 나의 결혼은 영원히 미뤄질 것 같기도 하지만, 난 괜찮다. (외동딸을 두신 엄마가 괜찮을지는 모르겠다. 엄마 미리 죄송해요!)
무엇보다 축구에 진심인 나는 알베르 카뮈의 말을 머리로, 마음으로 새기고 살고 있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축구에서 배웠다."
일상의 모든 것이 축구로 연결이 되는 나와 내 지인들은 아마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