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리와 골뱅이와 장만옥과 독서모임.
퇴사 후의 첫맛, 을지로 이야기.
퇴사를 했다. 퇴사를 하고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은 내가 참여하는 독서모임의 멤버들이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가 생각보다 힘들었기 때문에 SNS로 알게 된 몇몇 분들과 독서모임을 만들게 됐는데, 문제는 사는 곳이 다 달라서 모임을 자주 가지진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런 와중에 팬데믹을 겪기도 했으니 나를 포함해 멤버가 다섯 명인 우리 모임은 인원수나 매장 이용 시간제한에 걸리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독서모임은 정체하는 듯했지만 후에 알게 된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이용해 한 달에 한 번씩 온라인 독서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실제로 만나서 하는 것보단 확실히 덜하긴 해도 나름 만족하며 불편함 없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온라인으로 나누다 보면 당장에 오프라인으로 만나고 싶어 진다는 큰 단점이 있긴 했지만.
서울, 수원, 용인, 의정부, 창원.
사는 곳 하나 겹치지 않고 이렇게까지 제각각일 수 있다니 늘어놓고 보니 새삼 신기하다. 그래서 더 애틋한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다른 성격처럼 사는 곳도 제각각인 우리는 6월의 첫날, 힙지로라고 불리는 을지로에서 만났다. 장소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유명한 뮌헨 호프였다.
나는 국내에서 인지도가 높은 프랜차이즈 카페의 점장으로 일했다.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고 운영의 어려움을 겪으며 서비스업 종사자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스트레스와 질곡을 다 견뎌내다가 올해 5월까지만 근무를 하고 퇴사했다. 퇴사를 한 다음 날 바로 상경했다. 그리고 보고 싶었던 독서모임의 멤버들을 제일 먼저 만난 것이다.
점심시간에 약속을 한 우리가 고른 장소가 하필 노가리 골목의 호프집이었으니, 메뉴도 알 만하다. 하나둘씩 도착한 멤버들은 자리를 잡고 “일단 나 생맥주 한잔.”을 외쳤다. 모두가 짠 듯이 시워~언한 생맥주를 찾았고, 이어서 골뱅이와 노가리를 차례대로 주문했다.
오동통한 골뱅이가 가득 든 골뱅이 무침은 매콤 새콤한 것이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혀끝으로 안겨주는 메뉴였다. 여름엔 뭐니 뭐니 해도 비비는 재미, 비빔의 맛이니까.
보기 좋은 때깔로 구워져 나온 노가리는 말해 뭐하나 싶다. 동해 바닷가에서 해풍을 맞으며 자연 건조한 것이 을지로 노가리라고 하는데, 지금껏 호프집에서 먹었던 노가리의 맛쯤은 다 잊어버리게 할 만한 맛이었다. 시원하게 생맥주를 들이켜고 골뱅이로 배를 어느 정도 채운 우리는 노가리를 씹으며, 노가리를 풀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기에 지정 도서를 읽고 모인 자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책’에 대한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지만 ‘많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번에 누구 작가님의 신간이 나왔더라. 어느 출판사에서 하는 이런 일이 있더라. 이 책은 이랬고, 저 책은 저랬어. 무슨무슨 서점에 가 봤어?
하는 이야기들을 일상다반사 풀 듯이. 그렇지만 그 일상다반사를 풀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듯이.
한낮의 기온만으로도 꽤 더웠는데 맥주까지 우리의 온도 상승에 한몫했다. 온도가 상승하면서 목소리의 데시벨마저 따라 올라가는 듯했다. 호프집에서의 1차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삶의 질을 얼마나 높여주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아이스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상승한 온도와 텐션을 조금씩 다운시킨 우리는 을지로를 걸었다. 그때 불어오던 바람은 완벽했다는 표현밖에 쓸 수 없었는데, 내가 그 시간에 그곳에 서있다는 게 '행복하다'는 사실적 기분과 함께 불어온 바람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관리하던 매장에서, 본사에서 전화가 오진 않을까 신경 쓸 일 없이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해방감을 마구 느꼈다. 행복이란 별거 없구나, 그런데 그 별거라는 게 참 힘든 세상이구나. 퇴사를 하고 나서야 가능했던 눈물겨운 깨달음이었다.
세운상가를 걸으면서 아기자기한 여기저기를 구경했더니 금세 허기가 졌다. 우리의 2차 장소를 탐색할 시간이었다. 포털사이트에 검색한 ‘을지로 맛집’이라는 키워드는 다음 목적지를 쉽게 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두 번째 낭만 플레이스, 을지로의 장만옥을 만났다. 이름에서부터 중식당의 포스가 팍팍 느껴졌다.
오픈 시간에 맞춰서 갔는데도 핫 플레이스답게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대기를 해야 되나 싶었는데 운 좋게 우리 인원수에 맞는 테이블 하나가 남아서 금방 장만옥에 입성할 수 있었다. 내부 곳곳에서 홍콩의 바이브가 흘렀다.
장만옥의 대표 메뉴라고 하는 산동식 마늘쫑면과 마파두부, 표고 슈마이를 주문해 놓고 칭다오 생맥주를 마셨다. 핵심 메뉴들 다운 맛이었다. 특히 산동식 마늘쫑면은 다진 돼지고기와 마늘쫑을 볶아서 면을 넣고 비벼 먹는 요리였는데, 적당히 짭짤하니 맥주 안주로 아주 찰떡이었다.
1차에서보다 기름진 2차에서는 책보다는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우리 독서모임의 특징이 또 하나 있는데 나를 제외한 멤버가 전부 기혼자로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모임 내에서 유일한 자유로운 영혼, 막내를 담당하고 있었다.
대화를 하다 보면 결혼생활과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그것도 서로의 삶을 나누는 건데, 나는 정말 괜찮은데 언니들은 대화 중에 한 번씩 “미안해, 아줌마들을 이해해 줘.” 하셨다. 그 말은 내게 몹시 애잔하게 다가왔다. 그건 미안해할 일도, 이해를 바랄 일도 아닌데. 그냥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뿐인데.
우리 모임의 언니들은 누군가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주체적인 여성이 되기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낱낱이 밝힐 순 없지만 가정에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일도 하고, 글도 쓰고, 여러 방면의 수업도 듣고, 여행의 시간도 빼놓지 않으며 내면을 가꾸어 갈 줄 아는 멋진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언니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중이다. 독서모임 언니들을 만날 때면 난 참 복도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퇴사를 한 다음날 하루는 을지로에서 이렇게 끝이 났다. 비울 것은 비우고, 채울 것은 채우며.
살아갈 앞으로의 하루하루도 적절하게 비우고, 채우며 살고 싶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아가며 결국은 모두에게 해피엔딩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퇴사를 한 다음날 하루는 을지로에서 이렇게 끝이 났다. 비울 것은 비우고, 채울 것은 채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