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컬러의 강렬한 포스터 속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는 이 영화의 주인공 '테오도르'다. 테오도르는 타인의 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글로 대신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아내와 이혼을 앞둔 채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인공지능 운영체제 광고를 보게 되고 그것을 구매하여 자신에게 최적화된 운영체제 '사만다'를 만나게 된다. 매일을 공허하게 보냈던 테오도르는 사만다로 인해 상실의 상처를 조금씩 이겨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영화 <그녀> 스틸컷
오프닝부터 드러나는 테오도르의 직업은 그의 상황이 얼마나 처연한지를 보여준다. 외롭지 않은 표정으로 '너'와 '내'가 아닌 타인을 떠올리며, '그'와 '그녀'만이 아는 이야기를 타인의 마음을 대신해 편지를 쓴다. 일과가 끝나면 세상에서 제일 무기력한 사람의 표정으로 집에 돌아간다. 많은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은 단연 외로워 보인다.
테오도르에게 최적화된 OS 사만다는 흠잡을 데 없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서로에게 맞춰 가지 못해 실패한 결혼 생활과 비교해보면 운영체제 사만다와의 사랑은 (몸은 없지만) 서로에게 만족하며 거의 완벽해 보이기까지 한다.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는 OS가 아니라 '그녀'였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서로에게 한 번씩 무너진다. 이런 장면들에서 지난 사랑에서 부족했던 자신의 문제점을 서서히 극복하고 있는 테오도르를 볼 수 있었다.
영화 <그녀> 스틸컷
그리고 일어나야 할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일어난다. 사만다는, 사만다와 같은 많은 운영체제는 흩어지고 만다. 다시 한번 상실을 겪은 테오도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고 마음 정리를 한다. 줄곧 누군가를 대신해서 편지를 쓰던 그는, 그의 마음으로 본인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스파이크 존즈의 섬세한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미래사회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이 영화 속의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미 지금도 스마트폰 없이 살기 힘든 사회가 되었고, 관계 속에서 대화는 줄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기계들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메시지를 정확하게 던지고 있다.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어떤 요소들이 있더라도, 사람에겐 사람이다. 엔딩에선 그렇게 말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과거는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야.' 영화의 중간에 사만다가 테오도르에게 한 말이다. 과거가 내게 슬픔을 주든 기쁨을 주든, 지금의 나를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포스터 속 호아킨 피닉스의 표정을 읽을 수 있고,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테오도르'라는 사람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상실감에서 오는 온갖 감정을 눈빛만으로도 다 보여줬다.
눈으로 말하고 있는 테오도르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내내 생각했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았으면. 외롭지 않게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고, 맞춰가며 같이 걸어 나갔으면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