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라는 옷을 입고 인생 자체를 그려낸 델 토로.
델 토로가 판타지라는 옷을 입고 인생 그 자체를 그려냈다. 그간 그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모든 것을 이 영화 하나로 보여주는 듯했다. 역시는 역시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나이트메어 앨리>는 1940년대에 영화로 한 번 만들어졌었고 연출을 맡은 델 토로가 각본을 맡아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사연이 있는 듯한 남자 '스탠턴'이 우연히 카니발이라는 유랑극단을 만나고, 그곳에서 성실히 지냐며 많은 것을 배우고 마음을 빼앗긴 여인 '몰리'와 함께 대도시 뉴욕으로 떠난다. 뉴욕에서 성공적 공연을 하며 인지도를 쌓은 스탠턴이 심리학 박사 '릴리스'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상류층 사람들의 개인 상담을 시작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내내 촘촘한 연출을 보여줬다. 사실 기예르모 델 토로하면 연출 면에선 호불호가 갈린다고 한들 영상미나 미장센에선 모든 입과 손을 모아 찬사 하게 만드는 감독이 아닌가.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나, <크림슨 피크>,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처럼 그는 역시 섬세하고 치밀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희망을 거짓으로 보여줬을 때. 속이는 행위를 배려로 포장하여 거짓을 행하는 인간과, 뻔한 거짓을 받으며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인간의 내면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150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고 엔딩을 보고 나면 인생이 도돌이표라는 것을, 거짓으로 만들어 낸 희망이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짓이 끝나면 신의 얼굴이 응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으니까.
누구나 누구 보다의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는 '모르는 척' 하고 싶은 사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척' 하다가 뼈저리게 깨닫는 현실. 마침내 알아버린 스탠턴은 헛웃음을 보인다. 매번 선을 넘었던 그의 인생이, 선을 그으며 본인에게 다가올 줄은 몰랐으니까. 아니, 모르는 척하고 싶었을 테니까.
시대와 배경으로 봤을 때 미국 사회의 이면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아 있다.
배우들의 라인업 역시 완벽했다. 라인업에 올린 이름들이 말해주듯 연기 또한 누구 하나 빠질 데 없이 대단했고. 브래들리 쿠퍼, 루니 마라, 케이트 블란쳇, 토니 콜렛, 윌렘 데포.. 왜 그들은 덜 하지를 않나. 스포츠로 빗대어 보자면 거의 ‘올스타전’이다.
원래 브래들리 쿠퍼가 맡은 스탠턴 역은 처음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먼저 기회가 갔었다고 한다. 디카프리오.. 도 정말 잘 어울렸을 것 같지만, 쿠퍼도 연기는 정말이지 끝내주게 잘한다. 또 한 번 반했다.
그리고 내가 영화에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 바로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델 토로 이번 영화의 음악은 나단 존슨. <나이브스 아웃>의 음악 감독이었던 그는 라이언 존슨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만났던 사람이다. (이름에서 가족력이 느껴지다시피 라이언 존슨의 조카이기도 하다.)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의 20곡이 인생의 서사를 예술적으로 그려낸다. 그야말로 ‘들려주기’로 혼을 빼놓았다.
나는 150분 내내 알코올에 절은 듯한 퀴퀴한 냄새와 비와 오물의 비린내를 느낀 듯한 이 영화가 좋았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고, 내가 그의 영화를 보는 이유에 대해서도 감독은 지극히 '기예르모 델 토로'적으로 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