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의 재미를 알았을 때가 언제인가? 누군가가 묻지도 않는 걸 나 스스로에게 물으면 술을 배우기 시작한 스무 살 때라고 말하겠다. 음주생활의 시작과 함께 낮술이나 반주 같은 건 이미 시작됐었다.
자유분방한 10대였던 나는 어디로 튈지를 몰라서 개근상만 못 받았을 뿐 비교적 건전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게 당연한 일 같지만 당시에는 가출을 하거나 술이나 담배를 배우는 등 방황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는데 나는 그들과 친했어도 그중 하나도 하지 않는 10대였다.
수능의 계절이 오기도 전에 수시로 대학을 합격하고 고3 때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대학생이라는 닉네임이 붙었던 나는 야간 자율학습 출석 명단에서도 제외될 수 있었고 친구들보다 먼저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스물이라는 숫자를 받아들이기 전 워밍업 단계를 밟고 있던 열아홉 겨울이었다. 식구들과 모여서 식사를 하는데 할아버지께서 내게 술잔을 건네시며
"술은 어른들한테 배워야 좋다. 학교 가면 많이 마실 테니 미리 할아버지한테 배워둬라." 말씀하셨다.
나는 정말 진심을 다해서 단호하게
"저는 대학생 돼도 술 안 마실 건데요." 대답했다.
그때의 단호했던 이 한 마디가 내 인생 최고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신입생 첫 학기가 지나 여름방학 때 집으로 돌아온 내 체중은 10KG 가까이 불어 있었다. 단 몇 달 사이의 변화에 모교를 찾아갔을 때 선생님들이 한 번에 못 알아보실 정도였다.
나는 대학생이 돼도 술을 안 마실 거라는 입장을 바꿨고, 술은 나를 바꿨다.
술꾼들 사이에서 유명한 미깡 작가의 <술꾼도시처녀들>을 드라마로 제작한 <술꾼도시여자들>에서 술로 내기를 걸었다가 세 친구에게 평생 술을 공짜로 제공하게 되는 술집의 사장님은 이렇게 말한다.
"개는 똥을 못 참습니다."
어감이 어딘지 좀 그렇긴 한데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술을 참을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참을 생각을 하진 않는다는 애주가적 생각.
낮부터 마시는 술이 좋은 이유에 대해서 말하자면, 본질적인 면에서는 마시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 양적인 면에서 그만큼 많이 마실 수 있다는 것. 질적인 면에서 그만큼 맛있는 것도 다양하게 먹을 수 있으며, 핵심적인 면에서 그만큼 추억도 많이 쌓을 수 있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밤보다 낮이 좋은 이유가 술로 귀결이 될 수 있다니 늘 그렇듯 나 자신에게 놀랍다.
내게는 몇 번을 봤는지 모를 정도로 좋아하는 일본 드라마가 있다. <방랑의 미식가>라는 드라마인데 원작자가 그 유명한 <고독한 미식가>의 쿠스미 마사유키고 정년퇴직한 60대 남성의 퇴직 후 노년생활 적응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인 카스미 타케시는 성실히 일만 하고 지냈던 샐러리맨이었고, 그랬기에 늦잠도 낮술도 어색한 사람이다. 매 회차마다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리지만 소심한 카스미는 자신의 심정을 투영한 방랑 무사를 통해 조금씩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나는 <고독한 미식가>를 워낙에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이 드라마가 훨씬 좋았다.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술인데, 술을 안 마시는 미식가와 술을 마시는 미식가 사이에서 술을 사랑하는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겠나. 게다가 카스미가 낮 시간에 맥주 마시는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인다. 단순히 음주가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라 인생의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며 점차 안정감을 찾아가는 모습에서 보는 사람도 그 행복을 함께 맛본다.
드라마 속 인물처럼 우리들은 살아가며 각자 어떤 시기를 맞이한다. 올해로 접어들면서 그런 시기와 맞닥뜨린 나도 카스미처럼 천천히 적응해 가며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고 그 과정 속에 모르던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 번씩 그럴 때면 너무 놀란 나머지 낮부터 술이 당긴다. 낮술은 역시 못 참지 중의 못 참지인가!
요즘은 여유가 없어 딱 하루 쉬는 날에나 겨우 낮술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나 참을 수 없는 낮술을 마시며 바라건대, 못 참는 중의 못 참는 내 인생도 한낮의 맥주 같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