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는 것을 대체로 잘 견디지 못한다. 읽을 책이 있거나 볼만한 영화가 있더라도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더군다나 오랫동안 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나를 볼 정도로 큰 몸동작을 하진 않지만, 적어도 나는 꿈틀거린다. 불편하다는 티를 온몸으로 내고야 만다. 표출되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이 몸을 가득 채우고, 나는 뜨거운 콧바람을 뿜는다. 불편하다는 뜻이다. 나는 불편한 것을 오래 견디지 못한다. 불편함이 지속되면, 동시에 불안감이 상승해 호흡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이런 순간의 느낌이 나를 덮쳐오는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렸을 적, 다행스럽게도 나는 천방지축 어린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식당에 가도 그곳에 딸린 놀이방으로 뛰어가기보다는 가만히 앉아 밥을 먹는 아이였다고 들었다. 나를 식당에 데려간 엄마와 아빠가 천천히,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크게 움직이거나 떼를 쓰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고 묵묵히 밥을 먹은 채 그자리에서 곯아떨어지는 환상적인(?) 아이였다고 들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그런 모습은 그때보다 훨씬 성장한 지금의 나에게서도 살짝씩 보인다. 그러니까, 마음이 답답하여 엄청나게 꿈틀거리고 싶어도 참고 '몸'이란 껍데기를 하나의 '요새'로 삼아 나를 보관하는 것, 아주 살짝 들썩임을 통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는 인내심을 충전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라고 볼 수 있다.
나를 보는 사람들은 내가 아주 내성적이라 여긴다. 조용하고, 말이 없고, 생각이 많고, 진지하다고 여긴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조용하지만 시끄럽고, 말이 없지만 말을 굉장히 많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생각이 많지만, 동시에 단순하면서, 진지하지만 까불거린다. 양극화된 모순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나는 곧은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렴 어때' 싶은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곤 한다. 아무튼,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의 모습에 관해 왜 말을 꺼냈냐면.
내가 연극영화과를 전공했다는 사실은 늘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사람들은 내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과장된 리액션을 하는 사람도 있고,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둘 다 나에게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행동이다. 과장된 리액션을 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연극을 전공할 사람처럼 전혀 보이지 않는 이유가 뭔가요?' 물어보고 싶고,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눈을 게슴츠레 뜨는 이들에게는 '나에게서 어떤 연극적인 면모가 보이나요?' 물어보고 싶다. 나로서는 도저히,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연극영화과를 다닐 당시, 나는 그야말로 풋풋한 새내기였다. 대학에만 가면, 싫어하는 과학이나 수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좋아하는 '연극'만 오로지 팔 수 있을 거라 여긴 풋풋한 새내기. 대학에만 가면, 좋아하는 것만 오래도록 공부할 수 있고, 마음에만 품었던 어떤 열정을 기꺼이 표출해 낼 수 있을 거라 여긴 새내기. 나는 아주 특별하기 때문에, 여기서 조금만 배워도 금세 어떠한 기회를 잡아 꿈의 성공궤도를 달릴 수 있을 거라 여긴 새내기였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나와 같은 생각, 혹은 더 그럴듯한 생각을 한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무대는 하나고, 주인공도 하나인데, 아이들은 많았다. 하나의 연극이 관객에게 보이기 위해선 엄청난 시간이 든다. 무대나 소품을 준비해야 하고, 연극 연습을 통해 배우들의 앙상블이나 동선을 맞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과 성을 다하는 스텝들이 있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 당시, 나는 학과 안에서 열리는 오디션에 참가하여 '저는 스텝으로 빠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주인공을 탐내지 않지? 왜 해보지도 않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들은 그들이 가장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자리로 간 것뿐이다. 실제로, 그때 스텝을 했던 아이는 지금까지도 어느 극단의 스텝으로, 어느 공연장의 무대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나는 주인공을 원했던가? 나를 특별하다고 여기긴 했지만, 그래서 매번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긴 했지만, 정작 오디션에서 주인공 역할에 지원한 적은 없었다. 그랬다. 나는 만년 조연이었다. 주인공의 친구이거나, 주인공의 엄마, 혹은 주인공에게 크나큰 메시지를 주는 이방인과 같은 역할을 나는 참 좋아했다. 주인공이라는 자리가 엄청나게 커 보이거나, 내가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라고 지레 겁먹고 발을 뺀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두고 싶다. 나는 그저 '주인공'보다, '조연'의 자리가 편했다. 거기가 딱 내 자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궁금해했다. 왜 주인공에 도전하지 않고, 매번 친구 역할을 맡는지 궁금해했다. 배역을 맡지 않고 스텝으로 빠지는 아이들을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으면서도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 싫었다. 사실, 물어보는 행위 자체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하고 싶어서,라는 답에 진심을 담아도 결국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 뻔히 알았기 때문에 싫었다.
그게 결국 그 말이잖아. 주인공에 도전하기에는 좀 힘들 것 같고, 그래서 안전한 곳을 택하는 거 아니야?
실제로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주인공의 친구 역할을 맡고자 하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비교적 수월하게 주인공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가끔 주인공의 서사가 참 재미없다고 여겼다. 뭔가 대단한 갈망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혹은 환경적인 어떤 문제 때문에 주춤거리는 주인공이 참 한심스러웠다. 내가 보기엔, 더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어려운 길로만 가려는 주인공이 우스웠다. '결국,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나쁜 마음을 먹고 있는 역할에게 눈길이 가기도 했고, 주어진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면서 주인공보다 조금 더 성숙한 생각과 말을 가진 역할에 눈길이 가기도 했다. 내가 그들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정말 아무도. 주인공은 자신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준 역할에게 반짝 고마움을 표할 뿐, 자신의 인생을 살러 떠나기 바쁘다.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친구는 어디로 갔을까? 자신이 이미 겪은 어떤 감정에 발목이 잡혀 엉엉 울고 있는 주인공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달래주었던 친구는 앞으로 울 일이 전혀 없을까? 나는 그들의 다음이 궁금했다. 그러나, 모든 시선은 주인공에게 쏠려있는 상태이므로, 그들의 안부를 물어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래서 나는 '그들이 되는 것이 좋았다.'
내가 다닌 대학교에서는 한 학기에 하나씩 연극을 올렸다. 반년 정도를 꾸준히 한 작품에 파고드는 셈이다. 그러니, 마음을 쏟을 자리를 빠르게 구축하지 못하면 반년을 고생하게 된다. 나는 대학교 내내 주인공의 친구로 살았다. 주인공보다 조금 더 바보 같기도 하고, 어쩔 땐 성숙하기도 했으며,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의 인생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키가 될 수 있는 주인공 친구 역할은 내가 큰 욕심을 줄이고, 천천히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그 역할을 하면서 꽤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굳이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던 내 삶의 주인공이란 역할을 수행하는 나에게 있어, 주인공 친구 역할의 대사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포인트 지점이 되어주었다.
삶은 거대한 장편 영화로, 한 편의 연극으로 비유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이다. 중요하지 않은 역할은 없다. 어쨌든 한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이상, 물론 프레임 밖에서도 끊임없이 우리는 움직이고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특히나 주인공은 더 그렇다. '나'의 삶의 주인공인 '나'는 전체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과 어떻게든 성공과 부의 해피엔딩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온종일 시달린다. 나도 그렇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자기 전에도 그런 생각을 한다. 학교를 다닐 땐, 대사를 제대로 외우지 못하거나 주인공의 감정을 오롯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인생이란 주인공을 맡은 우리는 더 물러날 곳이 없다.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렇게 된 이상, 조금은 여유를 부려보아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주인공이라는 역할이 '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절대 변해선 안된다! 내 삶의 주인공은 나여야 한다! 다른 누구가 되어선 안된다!), 여유를 부려보자는 말이다. 이 친구 시점에서도 나를 보고, 저 친구 시점에서도 나를 보고, 하다못해 길가의 돌멩이의 시점이 되기도 하면서 나를 살펴보는 여유를 부려보자. 아득바득 살아오던 상황에 잠깐 숨을 돌릴 시간이 주어진다면, 방향을 잃고 급하게 쓰이던 서사가 제 길을 다시 찾을 가능성이 높다. 내 인생의 장르와 그에 걸맞은 이야기는 분명히 내가 써 내려갈 수 있다. 나에게 가장 편한 자세와 자리를 찾아 다시 시작해 보자. 막막해도 걱정하지 말자. 아주 잠깐의 암전 다음엔 훨씬 아름답게 재정비된 무대가 펼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