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먹어도 고기 먹은 것처럼

안나에게 제일 많이 듣는 말

by 김단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서 공원에 도착한다. 중심에 연못을 둔 공원은 연못 주변의 산책길을 깔끔히 조성해 놓았기에 생각이 많을 때 천천히 걷기 좋다. 나는 대부분, 연못을 두 바퀴 반 정도 걷거나 뛰었다. 주로 노래를 들으며 걷는 일이 많았다. 산책길은 반으로 정확히 갈라 연못과 가까운 쪽은 사람이, 먼 쪽은 자전거가 다닐 수 있었다. 지금은 나에게 자전거가 있지만, 자전거가 없었을 무렵엔 연못을 항상 내 왼편에 둔 채 걸었다. 노래를 듣거나, 듣고 싶은 노래가 없으면 주변 소리를 들었고, 그마저도 듣기 싫을 땐 귀를 막고 걸었다.


공원을 걷는 사람들은 제각각이지만, 나는 유독 할머니들을 자주 본다.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아도, 그들은 저절로 내 눈에 들어와 안나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잘도 걷는다. 그들은 자신만의 보폭으로 걷다가, 자신이 쉬고 싶을 때 곳곳에 위치한 정자에 앉고, 힘찬 목소리로 수다를 떨며, 다음 만날 약속을 잡는다. 운동기구를 움직이면서도 운동 이야기를 하고, 몸에 좋은 음식 이야기를 하고, 어제 본 드라마의 주인공에 관한 평을 늘어놓는다.


나는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지나친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나는 그들을 유심히 보며 지나친다. 그러니 그들이 가볍게 나누는 대화의 맥락을 모두 기억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보며 안나를 떠올린다. 날이 갈수록 행동반경이 더욱 좁아지는 안나를. 저들처럼 두 팔을 앞뒤로 마구잡이로 흔들고 보폭을 크게 하며 헛둘헛둘 걷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좁고 조심스러운 보폭으로 겨우 거실과 부엌을 오가는 안나를. 해가 지며 곳곳에 뿌려지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오히려 인위적이게 느껴지는 붉으스름한 빛이 아니라 사각형 안에 갇힌 빛만 보는 안나를.


그러면 화가 나는 것이다. 왜 안나는 아플까. 분명히 건강했는데, 왜 안나는 자꾸만 아파지고 있을까. 왜 안나는 괜찮아질 듯하면서도 다시 나빠지는 걸까. 왜 안나는 자꾸만 모든 것을 체념한 것 같은 말을 할까. 나한텐 씩씩하게 모든 것에 굳건히 맞서라고 이야기해놓고, 자기는 왜 자꾸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 같이 행동할까. 왜 안나는 고생에 고생에 고생만 하는 걸까. 나는 이제야 겨우 나를 알아가는 중인데. 그래서 이제야 겨우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대충 눈치채고, 과거를 수습하며 새로운 시작을 해보려 하는데. 안나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느긋하게, 그때까지 기다렸다 보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이, 마치 내가 성공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듯이 말한다.


죽음은 어둡다. 까맣다. 정전이 된 방 같다. 어렸을 적 살았던 아파트는 한 번씩 정전이 되곤 했다. 나는 제일 끝방에서 신나게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정전을 맞닥뜨리면 곧장 엄마가 있는 방으로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기곤 했다. 정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시끄럽던 모든 것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시야가 닫힌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혼자임을 느낀다. 사람을 찾아 뛴다. 문과 문지방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면서도, 어두운 곳에선 곧잘 부딪히게 마련이다. 아프고, 무섭다. 가만히 한 곳을 노려보면 어둠은 겨우, 아주 천천히 우리 눈에 곳곳의 사물을 흐릿하게 보여주곤 한다. 책상, 의자, 소파, 문, 문지방. 바뀐 것은 없다. 익숙해지면, 나름 괜찮다. 그러나, 언젠가 또 정전이 시작되면, 나는 또 놀랄 것이고, 나는 또 부딪히고 넘어지고 아플 것이다. 익숙한 것은 없다. 익숙해지지 않는 어둠. 익숙해졌다 착각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어둠은 익숙해지기 어렵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몸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다. 나는 아직 버틸 힘이 있었다. 연못 위에 있는 연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안나가 해준 말이 생각난다. 모든 것은 바람이 키운다는 말.


안나는 매일 나와 전화를 할 때마다 당부한다. 기죽지 말라고.


안나 : 어디서든 기죽지 마라. 죽만 먹어도, 죽도 못 먹었어도, 고기 먹은 것처럼 행동해라. 며칠 죽만 먹었어도 남들이 봤을 때, 고기 먹은 것처럼 느껴지게 힘 팍팍 내야 한다.


안나는 자신을 무식하다고 표현한다. 무식한 할머니라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러니, 개똥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건 네 몫이니 네가 알아서 알아들으라 한다. 나는 안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 무슨 말을 하지 않는지도 안다.


안나 : 잘해보려 하는 노력은 뭐든 좋다. 다만 그렇지 않은 것에 쏟는 노력과 마음과 힘은 아껴라.


안나는 무식하지 않다. 나는 안나보다 똑똑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안나는 나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해준다. 안나는 살아오며 부닥친 모든 것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습득한 사람이다. 안나는 싱거운 음식을 짜게 만들 줄 알고, 짠 음식을 싱겁게 만들 줄 안다. 안나는 외할아버지가 두고 간 모든 식물을 아직까지 싱그럽게 키워낸다. 안나는 가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을 한다. 살면서 워낙에 이것저것 다 겪다 보니, 웬만한 것은 다 안다는 뜻이었다.


그러는 안나가 죽음에 대해선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잘 모르겠단다. 별 생각이 없단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것을 만날 때도 되지 않았냐는 말을 한다. 외할아버지를 먼저 보낸 안나. 안나는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싶지 않고, 알아도 별 달라질 것이 없다고 한다.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 한다. 그때가 되면 자연스레, 노련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무식하면 무식 한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안나는 그러면서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겁이란 건 가까이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2021-10-10 19;03;23.PNG 안나와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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