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나학는 감지연 선공할근씨다
안나가 나에게 글을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안나가 글을 쓸 줄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렸을 적 내가 보낸 편지를 또박또박 읽고,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자막을 보며 웃기도 하고, 기도문을 열심히 읽고 외우는 모습을 보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나는 안나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에 재주가 없었다. 나조차도 지식이 없는데, 내가 누굴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늘 마음 한 자리에 굳건히 맺혀 있었다. 이십 대 초반에 성당에서 유치부 교리교사를 맡았을 때도 나는 돌아오는 한 주간이 너무나 힘들었다. 남들은 주말을 기다리는데, 나는 일요일이 두려웠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끊임없이 던지는 물음표에 갇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느님 살려주세요를 끊임없이 읊어야 했으니.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나에게 글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교재를 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이 사용하는, 가나다라마바사 글씨를 따라 쓰는 그 교재를 사야 하는 건가.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안나가 말끔히 해결해주었다.
안나 : 필요한 것만 가르쳐주면 된다.
지연 : 필요한 거?
안나 : 내 이름.
지연 : 할머니 이름?
안나 : 그래. 내 이름 쓰는 거만 알려주면 된다. 다른 건 배워가 뭐하겠노, 인쟈.
안나는 자신의 이름을 쓰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 석 자만 쓸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홀로 동사무소에 가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이름을 말하거나 종이에 이름을 적는 일이니, 그것만 할 줄 알면 좋겠다고 했다. 나의 힘으로, 나의 손으로, 직접 내 이름을 쓰는 일. 안나는 그것만 할 수 있다면 다른 건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나의 머릿속엔 늘 '안나와 나의 시간이 같지 않다'는 생각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그랬기에, 무언가 하는 것에 있어서, 특히 그것이 안나와 연관이 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망설이는 시간도 아까웠다.
집에 있던 종이를 모아 나름의 교재를 만들었다. 안나의 이름, 외할아버지의 이름, 나의 이름, 동생의 이름, 엄마의 이름, 이모의 이름, 이모부의 이름, 내가 키우는 강아지의 이름, 고마워, 사랑해, 건강하기와 같은 꼭 필요한 단어들, 안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만 적힌 교재였다.
안나는 내가 임의로 만든 교재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나름 심혈을 기울였지만 각각 크기가 맞지 않는 네모난 칸 안에 꾸역꾸역 자신의 이름을 넣었다. 처음의 도전은 의기소침했다. 획을 긋지 못하고 당황하는 모습도 보였다.
안나 : 쓸라하이 또 잘 안 되노.
지연 : 급하게 할 필요 없다, 할머니. 천천히.
안나 : 쓰는 방식을 잘 몰라. 뭐부터 시작해야 하노.
지연 : 할머니 마음대로.
안나 : 내 마음대로? 그럼 대반에 써뿌지.
안나는 정해진 방식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 건 없다고, 할머니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 거침없이 이름을 써나갔다. 쓰는 방식은 몰라, 그냥 결과만 잘 나오면 되는 거지. 안나는 점점 더 힘을 얻는 듯했다. 자신의 이름이 만드는 모양을 신기해하다가도, 이름에 얽힌 무언가를 떠올리며 잠시 감상에 젖었다가도, 다시 힘차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글씨는 갈수록 또박또박해졌다.
안나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쓸 줄 안다. 그 무엇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잘 써 내려갈 수 있다. 안나가 글을 배우지 못한 이유에 관해선 물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글씨를 배울 틈이 없었을 것이다. 글씨를 배우기 이전에, 살려야 할, 키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손이 모자라는 바람에 연필을 쥘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안나에게 글씨는 너무나 무거운 것. 쉽게 써지지 않는 것.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는 것. 안나는 오늘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적음으로써 많고 많은 것들 중 하나를 해냈다. 자신의 힘으로.
안나에게 부적을 써달라고 했다. 어디서든 힘이 부칠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부적. 무언가를 쓰는 것에 자신감이 붙은 안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안나는 열심히 무언가 적었다. 글씨는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솟았다가, 빈틈에 아무렇게나 들어가곤 했다. 완성하고 보니, 희한하게도 정말 부적의 느낌이 났다. 안나가 말했다.
안나 : (애할며니를 짚으며) 외할머니, (감지연 짚으며), 김지연, (살나학는 짚으며) 사랑하는, 김지연, (선공할근씨다 짚으며) 성공할 것이다!
지연 : (박수) 대박 부적이네. 나 이거 힘들 때마다 보면서 힘낼게!
안나 : 그래야지, 그러라고 쓴 건데. 또 하나 더 쓸라니께.
안나는 펜을 놓지 않았다.
안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한다. 안나는 나의 모든 것을 축하한다고 한다. 안나는 나의 건강을 바란다. 안나의 글씨에는 힘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안나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으며, 나의 모든 것이 건강해야 한다고 느낀다. 모든 것은 안나의 글씨로부터. 자음과 모음이 멋대로고, 정확한 발음으로 쓰이지 않았어도 나에겐 그 모든 글씨들이 '원래' 맞는 것처럼, 마치 '원래' 그렇게 생긴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오로지 안나만이 쓸 수 있는 무엇.
펜을 들었을 안나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펜의 무게와 상관없이 그것은 무겁고, 짙고, 번질 것이다. 첫 시작을 하지 못해 첫 획부터 당황하거나 방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 것을 안다면. 자신이 무엇을 쓰고 싶은지,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안다면, 그때부터는 거침없다. 오로지 자신만의 방식대로 글을 써 내려간다.
안나 : 틀린 것은 배우면 되지. 다음부터 그렇게 안 하면 되지. 다음에 또 그렇게 했다? 그럼 그 다, 다음부터 또 안 하면 되는 거고. 그러면서 배워나가는 거고, 배우면서 많이 토라지고, 꺾이고, 무뎌지는 거고. 그러면서 거기서 또 저절로 알게 되는 것도 있고. 살면서, 계속. 계-속.
사는 것은 끊임없이 배우는 것. 배우면서 또 다른 것을 배우는 것. 하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를 또 알게 되는 것.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있고, 그러면서 모르는 것은 더 많아지는 것. 알고 싶다는 생각과 모르는 생각이 공존하면서,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는 것. 배운 것들을 고쳐나가야 할 때도 있고, 배운 것이 정답에 가까운 오답이었다는 것도 알고 인정하는 것.
안나는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동사무소에 가도, 병원에 가도, 내 이름 석자는 쓸 수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한다. 그걸로 되었다니. 이 얼마나 멋지고 차분한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