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 결혼 결사반대
안나가 나에게 요즘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오는 안나의 눈엔 별 기대감이 없다. 나는 매번 안나가 이렇게 물어올 때마다 '없다'라고 말했으므로, 지금도 '없다'라고 말했다. 이 대답은, 내가 별 이상한 놈을 만나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싶어 잔뜩 찌푸린 안나의 미간을 풀어주기 위해 뱉는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정말 만나는 사람이 없으므로, 없다고 말할 뿐이다.
내가 정말로, 여태 서른셋이 되는 동안 만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간간이 사람을 만나왔고, 이별의 아픔도 겪어왔다.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족속을 만나기도 하고,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것처럼 나와 너무 닮은 사람과 만나보기도 했다.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였다. 처음에는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았다. 굳이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하나부터 열까지 딱 맞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어떤 일이든 함께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와 너무 닮은 사람과는 자주 싸우게 마련이다. 자주 싸우고, 자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주 멀어진다. 나는 나와 수없이 헤어지곤 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되면 감정의 부딪힘이 일어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인뿐만 아니라, 친구 사이, 혹은 형제, 가족들끼리도 감정의 부딪힘은 늘 일어나게 마련이다. 나는 모든 감정싸움에 있어 늘 패배자였다. 감정으로 인하여 부딪히고, 싸우고, 속상하고, 울고, 다시 화났다가, 허탈해지는 모든 과정이 너무나 버거웠다. 감정 소모. 소모되는 감정. 남아서 다른 동력으로 쓰여할 감정이 쉬지 않고 몰아치고 나면, 나는 금세 나가떨어졌다. 나는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성격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해심이 좁아 쩨쩨하고, 어쩌면 바라는 게 많아 철이 없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시작도 전에 먼저 주저앉곤 했다. 감정이 이렇게 쓰이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해서, 누군가들에게는 지독하고 추잡하다는 평도 들어봤다. 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은 사람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나 동물에게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다못해 이름이 있는 모든 것들은 사랑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엎어진 것을 일으켜 세울 수 있으며, 우는 것을 달랠 수 있으며, 떨고 있는 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힘.
삼포 세대라는 말을 들었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 발음은 다르지만 하나의 같은 뜻을 갖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물론, 이런 것들이 꼭 힘든 것만은 아닐 테다. 내 주변에만 보더라도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잘 이어나가고 있는 모든 짝들이 많다. 분명, 그들끼리도 아픔이 있을 것이고,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고인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것들을 뒷문으로 잘 흘려보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한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 나는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럽다. 나는 매번 허덕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숨을 잘 고르는 사람이 부럽다.
나는 언제나 도망칠 수 있는 경로를 미리 파악해놓는 사람이었다. 연애를 함에 있어서는 늘 그랬다. 열렬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경은 온통 그의 뒤에 있는 비상구에 향해있던.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만 알려고 했던. 그러면서, 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맞춰 나도 그가 좋아하는 하나의 무엇이 되고 싶어 했던. 사랑을 하면서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지독한 증상이지만, 나는 그 증상이 매번 버거웠고, 부담스러웠고, 끝끝내 부작용을 앓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잠시 거리를 두는 것. 나는 연애와 꽤 오랜 시간, 아주 많이 거리를 두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 주변엔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종용하는 사람들이 없으며, 친구들은 알아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순서대로 잘 이어나가고 있다. 나는 그들을 진심을 다하여 축복한다. 사랑을 하는 친구들은 예쁘다. 나는 그들이 아프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힘껏 박수를 친다. 앞으로도 열렬한 사랑의 퀘스트를 깨기 위해 나설 친구들을 위하여.
안나는 나더러 결혼할 생각일랑 말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나 우스워 듣자마자 깔깔 웃었다. 내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는 것을 보며 안나는 대체 어느 부분이 웃겼냐고 물어왔다.
지연 : 아니, 그렇잖아. 다른 사람들은 다 결혼하라고 난리인데. 왜 할머니는 나보고 결혼하지 말라고 해?
안나 : 좋은 사람이 있으면은 결혼을 하면 되지. 아예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지.
지연 : 좋은 사람이 있을까.
안나 : 언젠간 나타날지도 모르지.
지연 : 별로 기다리고 싶지 않은데.
안나 : 그래, 그럼 고마 하지 마라! 결혼 같은 거는 안 하면 안 할수록 좋다. 니는 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돈 많이 벌면서 살아라, 그기 최고다.
안나는 나를 설득할 생각이 없다. 아니, 안나가 왜 나를 설득하겠는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출산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안나는 나에게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 말을 줄곧 한다. 하지 말라는 말이 이렇게나 다정하게 들릴 줄이야. 때리치아뿌라! 안나가 외치는 말은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어떤 마법 주문과도 같게 느껴진다. 하필 발음도 그렇다. 때리치아뿌라! 아주 강력한 주문인 것 같다.
지금 내 나이는 결혼은 언제 하냐, 할 사람은 있나, 할 마음이 있나, 등등의 질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받아야 할 나이였다. 하지만, 안나는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 날, 안나에게 왜 그런 걸 묻지 않느냐고 물었다. 안나가 말했다.
안나 : 내가 물어서 뭐하노.
지연 : 왜? 내 친구들은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꼭 손주 봤으면 좋겠다고 그러면서, 빨리 결혼하라고 그랬다던데. 다들 그렇게 바란대. 할머니는 안 그래?
안나 :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다.
지연 : 뭔데?
안나 : 니 행복.
안나는 나의 행복을 바란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며 사는 행복이 아니라, 홀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면서, 매일매일 사춘기를 겪는 독립적인 나의 행복을 바란다. 그저 '나'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다.
순전히 어떤 한 사람의 행복을 바라게 되면, 모든 이야기는 맥락이 달라진다. 연애, 사랑, 결혼, 출산 모두 좋지. 그런데 그게 너에게 불행이라면 굳이 하지는 마. 남들이 다 좋다고 해서, 너에게도 좋은 것만은 아니야. 피할 수 있으면 피해.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 대신 너무 마음을 꽉 닫아놓지는 마. 안나는 끊임없이 나에게 속삭인다. 안나가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나에게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다.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베풀 줄도 안다고. 나는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잘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것이 버겁기에 나는 천천히, 천천히, 일단 나 자신부터 잘 사랑하고 난 다음에 다음 사랑을 이어가려 한다. 약간은 막막하다. 마치, 여름방학 때 써야 하는 일기를 잔뜩 밀린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