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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들 Oct 30. 2023

14년차 부부의 싸울 결심

브런치 첫 글이 부부싸움이라니

 

 밤 10시가 넘은 으슥한 시각, 아까 분명히 퇴근하고는 말짱히 주차해두었던 그 차에 새삼 시동을 걸고 되도록 구석지고 아늑한 곳으로 이동시킨다.


 오늘의 전쟁을 계획하는 부부는 없다. 각자의 하루에 주어졌던 일의 무게를 그대로 양어깨에 짊어지고 과속 카메라를 날랜 동작으로 피해 가며 퇴근에 성공. 아빠, 엄마와의 저녁 시간을 종일 기다렸을 귀여운 강아지들이 달려나온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집으로 향하는 5분이 주는 벅찬 감정은 남편과 내가 어쩌다 한 마음이 되는 순간이다.



 

 우리 부부의 설전 장소는 늘 주차장 차 안이었다. 아이들과 저녁시간을 보내고 어느새 내 몸 배터리가 꽉 채워졌음을 느끼며 오늘 하루 잘 보냈다고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갖기도 전에 평범한 일상을 질투하듯 전쟁이 시작된다. 이런 게 안전불감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평온할 거라는 믿음, 오늘은 별일 없을 거라는 안온한 생각을 뒤집고 날 시험에 들게 한다. 사소한 것에서 불씨가 커져 그날의 평화는 거기까지이고 이제 전쟁터로 가야 할 시간이다. 전쟁의 역사를 되돌아보니 주차장으로 매번 가는 이유는 대략 아이들을 피하기 위함이다. 남편과 서로를 자극하는 말들을 특기인 복화술로 주고받다가  ‘차로 와’ 한마디 던지고 먼저 내려가 적당한 장소로 차를 옮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할 수 있어서, 그 이야기를 목청껏 내지를 수 있어서, 듣는 사람이 없어서, 주차장 차 안을 부부싸움 최적의 장소로 추천한다. 자랑하는 건 아닌데 이곳은 나의 전승지이기도 하다.
 남편이 차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는다. 집에서 언성 높이다가 주차장으로 장소를 이동해 내려오는 5분 정도의 시간 동안 분노가 50%로 줄었다. 제대로 전쟁을 치르기 위해 분노 게이지를 끌어올려야 하는데 쉽지 않다. 남편은 아까보다 좀 점잖은 얼굴로 내 옆에 와 앉았다. 평정심에도 탄성이 있는지 우리는 싸우기 위해 내려왔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성을 찾는다. 싱겁게 끝나는 작은 전쟁을 치르고 서먹해져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누는 대화는 방금 전 서로를 뜯어먹으려는 맹수의 눈빛과 사뭇 다르다.




 뭐,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 다행히 분노게이지가 추락하지 않고 차에 타게 되는 날은 차 안에 고성과 분노가 가득 차 성에가 뿌옇게 내려앉는다. 이해할 수 없는 서로의 말들을 왜 이해하지 못하냐며 내뱉는 동안 몸은 점점 피곤하다. 집에서 편한 차림으로 무방비 상태였다가 전쟁준비를 제대로 못하고 내려온 그는 영하 10도 날씨에 잠옷차림으로 맨발에 가디건만 걸치고 차가운 차 안에서 적과 함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술이 파래지는 그를 보며 추우니까 빨리 항복하고 들어가라고 강한 눈빛을 쐈는데, 그날의 싸움은 말실수한 나에게 원인이 있던 터라 항복하지 않을 모양이다. 신혼 초에는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색출하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누가 먼저 미안하다고 할 것인지에 대한 눈치싸움이다. 왜 우리 부부는 아직도 이런 것들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걸까.




 내뱉는 말들만 난무하다가 시간이 지나 듣는 말도 생기면서 이제 화해의 시간이 직전인데 그전에 추위가 먼저 찾아온다. 우리가 집으로 간 이유는, 그날의 사건이 해결돼서가 아니라 그가 너무 추워서였다. 적군은 퇴근하고 옷을 바로 갈아입지 않은 탓에 두꺼운 기모티에 어그부츠를 신고 참전했는데 정작 본인은 무기가 약했던 탓인지 공격을 멈추고 항복한다.  우리는 어찌됐든 집으로 가 각자의 방에서 숙면했다. 





 18만 킬로를 넘기며 우리 싼타페의 공적을 기록하고 싶었다. 우리 둘만의 공간이었다가 아이들과의 공간이었다가, 지금은 매일 왕복 2시간 장거리 출퇴근하며 사유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이 차에 좋은 기억이 많지만 정작 떠오르는 것은 밤늦게 잠옷 차림으로 나와 쌓인 말들을 내뱉던 날들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나는 남편에게 쏟아냈지만 말없이 받아준 건 이 공간이었다. 층간소음과 아이들의 시선을 피해 맘 편히 터놓을 수 있는 곳, 남편과의 적당한 거리, 화해하기에 아늑함 등을 이유로 늦은시각의 주차장 차 안을 부부싸움 장소로 추천한다.


p.s  전승지이지만 썩 기분이 별로인건 싸워서 이겨도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공회전 차안에서 히터틀고 싸우는건 사치다. 이제 쌀쌀해지는데 공회전하는 날이 안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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