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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해 Mar 22. 2024

간헐적 단식으로 배고파서 짜증 난 것이 아니고

  독일남자 TK가 20시간 안 먹고 4시간만 먹는 간헐적 단식을 몇 년째 하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단다. 일단 가장 좋은 점은 젊어 보인다는 것이다. 

  "오호, 그래?"

  이런 걸 안 따라 해 볼 수 없다. 

  TK는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밤에 여러 종류의 과일을 예쁘게 썰어 저녁으로 먹는다. 그러니 에너지원이 될만한 건 점심 한 끼가 다다. 그런데도 활력 있고 혈색이 좋은 것을 보면, 사람은 한 끼만 먹어도 살 수 있나 보다. 무엇보다 20:4 간헐적 단식을 하고 나서는 젊어 보인다지 않나. 


  나는 아침에 따뜻한 밀크티에, 버터와 쨈을 바르고 치즈를 올린 토스트를 먹기 위해 일어나기 때문에, 저녁을 안 먹는 쪽을 택한다. 일단 배가 쏙 들어가는 것이 좋긴 하다. 그런데, 딱히 배가 고픈 것은 아닌데, 쉽게 쉽게 짜증이 난다. 아니, 확 짜증이 난다. 내가 짜증 났다는 것이 싫어서 또 짜증이 난다. 


  짜증은 TK가 데리고 온 필리핀 아가씨 때문에 시작되었다. TK는 랭귀지스쿨에서 여자애 하나를 알게 되었는데, 8시부터 10시까지 듣는 수업이 끝나면, 거의 날마다 이 여자애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둘이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하루종일을 보내는데, 거실 테이블에 앉아 이것저것 하는 나로서는 그들이 시시덕거리는 꼴도 보기 싫고, 그들의 대화소리에 집중을 방해당하는 것도 싫고,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것은 나인데, 손님으로 온 그녀는 마치 제 집인 양 편안해하고 내가 오히려 눈치 봐지는 게 영 마땅스럽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그냥 싫은 것일 것이다. 그녀는 TK를 알게 된 '둘/째/ 날'부터 딱 붙어 지내기 시작했는데, 나는 뭐 저런 가벼운 여자가 있나 싶어 그냥 그녀가 싫다. 물론 TK의 진중하지 않음도 싫다. 

  'TK, 넌 두 달 후면 태국으로 떠나잖아? 넌 저 애와 관계를 지속할 생각도 없지 않아? 어린 동양 여자애를 너무 가볍게 작업하는 거 아니야?' 하고 비난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고, 된장, 꼴 보기 싫은 내가 방으로 피해 들어간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메이쓰도 방으로 피해 들어오며 내게 하는 말이.

  "네가 왜 저 둘이 사귀는 게 확실하다고 말했는지 알겠어. 둘이 소파에 포개 누워서 눈 둘 곳이 없어서 방으로 들어왔어. 거실 불을 끄고 있어서 불을 탁 켜기도 좀 그렇고."

  저 둘이 저러고 있는데,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 게 나 혼자만 불편한 일이 아니구나......!

  "난 정말 짜증 나 죽겠어. 어째 매일 와서 저런다니?"

  메이쓰에게 불평을 쏟아내고 나니 좀 살만해졌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짜증이 나는 이유가 연애 못하는 내가 연애하는 애들을 봐내야 해서 질투가 나서 그런 게 아니라, 저들이 친밀한 행위를 하면서 다른 사람 눈 둘 곳 없게 만드는 것이 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짜증이 날 수 있는 거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행동은 타인에 대한 무례였다. 이건 어떤 무례함이냐면. 흑인노예 시절에 백인아가씨가 남자 흑인노예가 방 안에서 빤히 보고 있어도 노예를 물건인 양 여기기 때문에 아무렇잖게 옷을 갈아입고 한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런 무례함. 타인의 존재를 배려하지 않아서 생겨나는 무례함.

  나보다 한참 어린 메이쓰는 가볍게 아는 것을, 나는 몇 날 며칠 짜증이 나고, 이 짜증은 왜 나는 것인지 궁리를 하고, 그러고도 혼자서는 끝내 몰랐다가 메이쓰의 말을 듣고서야 겨우 알아졌다. 그들이 무례했기 때문에 내가 짜증이 났다.


  이렇게 일어난 짜증은 며칠을 갔다. 나는 노처녀 때도 짜증 낼 줄 몰랐는데.....


  날씨가 화창해지자 기분이 그냥 좋아졌다. 학교 자원봉사자 저웨이를 만나 중국어 이것저것을 물어보면서 기분이 다시 환해졌다는 걸 느낀다.

  "오늘 날씨 너무 좋은 것 같아! 사람기분까지 다 좋아지는데?"

  "나도 그저께는 기분 정말 꽝이었어. 꿀꿀하게 비 오고 해서." 

  저웨이는 밝음을 가장하지 않아서 그와 대화하는 것이 참 편하고 좋다. 저웨이와 대화를 나눌 때는 기분이 좋아서 말도 놀라운 속도로 나온다. (내 중국어 실력은 대화 상대를 가린다. 말을 버벅거리고 있다면, 내가 상대에게 불편을 느낀다는 뜻이다.)


  벌써 4월이 가까워오는데, 올해 대만의 봄은 한국의 봄보다 더 춥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빨리 따뜻해지지가 않는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햇살이 따사로워서 막 행복하다. 봐, 그냥 날씨 때문에도 단순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나 같은 사람을! 감히 짜증 나게 하다니. 

  그녀, 싫어! 

  TK도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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