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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해 Mar 30. 2024

저 녀석, 치사해죽겠네

  대만서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세어 하우스인데, 독립된 방을 나눠서 쓰는 식이 아니고 같은 방에서 침대칸을 나눠 쓰는 학교 기숙사 같은 세어 하우스다. 우리나라 아파트 평수로 치면 한 50평쯤 될만한 공간에 방이 세 개고, 욕실이 두 개고, 부엌이 있고, 현관을 겸한 앞 베란다와 세탁실을 겸한 뒷베란다가 있다. 가장 작은 방은 2명이 쓰도록 되어있고, 나머지 두 방은 각각 4명의 여성용 방과 남성용 방이다. 

  내가 맨 처음 살러 들어왔을 때는 여성 전용 숙소였는데, 여자애들끼리 다툼이 잦아지자 집주인이 얘가 어떻고 째는 어떻다는 불평불만을 더는 듣고 싫지 않아서, 숙소 경영을 그만둔다는 거짓말로 오랫동안 살던 아가씨들을 다 쫓아내 버렸다.  다행히 집주인이 나만 계속 살도록 해줬다. 아마도 갈 곳 없는 어리버리한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집주인의 동정을 샀기 때문일 것이다.

  집주인은 욕실을 깨끗하게 수리하고 대 청소를 한 후에 새로 손님을 받으면서는 남녀가 함께 사는 집으로 바꿔버렸다. 집주인의 말로는 남녀가 같이 살아야 여자애들이 행동을 좀 조심한다는 것이다. 남녀가 같이 산다는 것이 영 불편할 것 같아 나도 처음에는 반대를 했는데, 살아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여자애들은 덜 싸우고, 덜 수다를 떨고, 덜 물건을 아무 데나 널브러뜨렸다. 

  또 여자애들끼리만 살 때는 저녁이면 '내가 누구 다음에 샤워한다고 줄 섰어' 하면서 화장실을 경쟁했어야 하는데, 남자애들은 샤워하는 시간이 짧아서 화장실을 경쟁하는 일도 줄었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중드 여러 편을 보다가 잠이 좀 올 것 같으면, 화장실을 한번 들렀다가 잔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 화장실 두 군데가 다 문이 닫혀있다. 누군가 쓰고 있다는 소리다. 가끔은 안에 아무도 없는데도 문이 닫힌 것만으로 누가 안에 있겠거니 하고 바보처럼 기다릴 때도 있다. 한참을 기다리다 왜 이렇게 안 나오나 하고 노크를 하고서야 안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 그날 밤도 그럴 수 있어서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봤지만, 무작정 노크를 했다. 안에서 아무 인기척이 없다. 문을 빼꼼 밀었다. 아, 그리고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아! 미안, 미안."

  독일사람 TK가 발가벗은 채로 변기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가 놀라 힘껏 문을 당겨 닫았다. 

  나는 그 짧은 새에, 아주 빼꼼 열린 틈 사이로 다 보고 말았다. 그가 겉옷을 입고 있을 때면, 허벅지에, 팔뚝에,  목에 문신이 가득하게 보이는데, 열린 문틈으로 보인 그의 알몸은 마치 여자 아이의 살결인 듯 온통 하앴다. 

  '그의 문신은 어디 간 거지?'

  나는 그가 울퉁불퉁한 근육질 몸매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미꾸라지처럼 매끈하게 빠진 몸매를 하고 있었다. 나는 거뭇거뭇한 부위도 보고 말았다. 

  '아니, 안에 있으면서 왜 노크를 했는데 대답도 안 했던 거래?' 


  다음날 일어났을 때, 이걸 사과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필리핀아가씨 메이쓰에게 물어본다. 

  "내가 정식으로 사과를 하면 그가 더 어색해하지 않을까? 사과를 해야 해, 말아야 해?"

  메이쓰는 시간이 약이라며 덮어두는 것이 낫지 않겠냔다.  

  그래, 일부러 사과를 하지 않았다. TK는 화장실 문을 열어젖힌 게 나란 걸 아는 듯이 그날로부터 나를 본 척도 안 하기 시작했다. TK는 늘 먼저 인사를 건네던 쪽이었다. 

  '나도 피해자라고. 네가 화장실 문을 잘 잠그던지, 아님 노크소리에 재빠르게 반응을 하던가 했었어야지.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너의 고의적인 냉대를 받아야 한단 말이야?'


  시간이 약 이랬으니 한 일주일쯤 지나면 기억이 옅어질 것이고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상당 흘렀지만, TK는 여전히 인사를 들은 척도 안 해서 사람 기분을 상하게 만든다. 

  스물몇의 어린 남자애도 아니고 서른 후반인 남자가 어쩜 저렇게 쪼잔하고 치사하게 구는지. 

  까짓 거, 내가 알몸을 봤던들. 알몸을 가 봤어도 일주일이면 풀렸겠다. 정말 치사해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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