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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해 Mar 28. 2024

술을 끊었어도 한잔 해줘야 하는 날

또 하나의 졸업관문 통과

  졸업을 위한 관문이 일곱 있다. 

1.21학점 이수하기

2. 온라인으로 학술윤리수업 수료하고, 시험을 쳐서 85점 넘기기

3. 학교가 인정하는 기관에서 한 학기 동안 실습하기

4. 학술지에 최소 한 편의 논문이 실리거나, 학술토론회에서 최소 두 번 논문 발표하기

5. 박사자격시험 치기

6. 졸업논문 프로포절(proposal) 구두발표하기

7. 졸업논문 쓰기와 발표하기


  어제 4번 항목을 finish 했다. 내가 '완료'라고 하지 않고, 특별히 영어를 쓴 것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려는 의도이다. 어제 발표했던 소논문이 바로 '한 언어로 말하는 중에 다른 언어를 섞어 쓰는 현상'에 관한 거였다. 이걸 코드전화(code-swithing)이라고 한다.


  내가 운이 좋은 것이 내 바로 전 학번은 '학술지에 최소 한 편의 논문 싣기'였던 것이, 내가 입학하던 해에 '또는 학술토론회에서 최소 두 번 논문 발표하기'로 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또다시 옛날 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학술지에 논문이 실리는 것은 토론회에 발표하는 것보다 한 세배는 어렵다. 만약 내 졸업 관문에 이 규정이 있었더라면, 이 관문을 못 넘어 다음 단계로 못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발표를 마치고 저녁 만찬에 참석했는데, 내가 졸업의 한 관문을 통과한 것을 축하해 주는 듯이나, 테이블마다 포도주가 한 병씩이 나왔다. 루어삔이 술을 권한다. 

  "에이, 나 술 끊었는데....."

  "동해, 술을 끊었어도 오늘은 마셔줘야 해. 우리는 막 졸업관문 하나를 통과해 냈다고. 자축해야지!"

  '그래, 맞아! 오늘은 한잔 해주는 거야!' 


  <학술지에 최소 한 편의 논문 싣기 또는 학술토론회에서 최소 두 번 논문 발표하기>는 누군가에는 참 어려운 일인데, 나는 정말 간단하게 이 항목을 끝냈다. 누구는 박사 수업을 들으면서 손에 투고할 만한 소논문하나 못 만들기도 한다. 나는 박사를 시작하던 첫 학기와 두 번째 학기에 좀 힘겨운 수업을 들었더랬다. 그 과목들을 수강하면서 빡세게 쓴 기말보고서가 이렇게 쓰일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말보고서 용으로 쓴 소논문을 정말 글자 하나 안 고치고 투고를 했는데 운 좋게 대번에 통과했다. 


  발표도 얼마나 수월하게 했는지 모른다. 첫 번째 발표는 발표자들이 워낙 많아서, 같은 시간대에 여러 교실에서 한꺼번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방청객이 적어서 심리적으로 부담이 적었다. 발표가 끝나고 누군가가 질문을 했는데, 긴장하는 바람에 뭘 물었는지 파악을 못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 쪽을 좀 팔긴 했지만.


  두 번째 참석했던 토론회는 큰 강당에서 진행되는 줄 알았는데, 그냥 일반 교실에서 진행되었고, 내 논문 대담자도 교수님이 아니라 나와 같은 학생이어서 수업 중에 구두발표하는 느낌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 (지난해에는 아주 큰 강당에서 진행됐었고, 교수님들이 대담자로 와서 논문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지적을 했었다.) 

  논문 발표에 15분인데, 대담자가 내 논문에 대해 평가하고 질문을 하는 시간은 10분이나 돼서, 상대가 열정적으로 나온다면 상당히 많은 질문을 받아야 해서 이것도 딱히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난 또 완전 운이 좋았던 것이, 내 논문 대담자가 내 동창 페이팅이었다. 토론회장에서 페이팅을 만났을 때 그녀에게 우는 소리를 했다.

  "페이팅, 날 너무 곤란하게 할 질문은 안 할 거지?"

  "네 논문에서 보완할 점들을 PPT로 만들어왔는데, 그거부터 말하고 마지막에 한 두 개쯤의 질문이 있어. PPT 지금 너한테 보내줄까? 먼저 보고 준비할래?"

  "아냐, 야냐. 괜찮아. (지금 보는 것도 상당히 귀찮아.) 내가 너의 긴 질문을 제대로 못 알아들어서 대답을 못하면, 간단한 문장으로 다시 질문해 줘. 그거면 돼."

  연구회에서 질문을 던지는 자들을 보면, 정말 그게 궁금해서 콕 집어 그걸 질문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 분야에 이렇게 저렇게 아는 게 좀 있는데 하는 식으로, 자기 지식을 늘어놓아가며 이야기를 하는지라 정말 묻겠다는 게 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나는 그게 두려운 것이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점심이 늦게 도착해서 지연된 10분을 커버하기 위해, 발표와 대담을 한 세트로 묶어하던 방식을, 일단 두서너 학생들이 발표를 다 하고, 대담자들의 의견과 방청석의 질문을 한꺼번에 다 들은 후에 종합해서 답하도록 방식을 바꿨다. 그 덕에 질문을 듣고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 여러 질문을 모아 한번에 답하다 보니 몇 쯤 덜 답한다고 해서 내가 몰라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너무 많아 한둘쯤 누락한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많은 질문에 반만 대충 대답을 하고도 멍청해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비록 운이 반이었긴 했지만, 오늘 하루쯤은 '나 잘했어요!'하고 한껏 칭찬해 주기로 한다.


  나, 드디어, 5번 항목 박사자격시험 준비로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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