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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해 Apr 02. 2024

수박 먹을래?

  TK는 20시간 먹지 않고, 4시간 동안 먹는 삶을 살고 있다. 저녁은 과일을 먹는다. 냉장고는 항상 그의 과일로 가득하다. 다 먹지 않은 수박은 얼린다. 그걸 녹여 먹으면 맛이 있나? 

  오늘 이걸 따지자는 것이 아니고.

  

  그저께 TK는 필리핀 아가씨 메이쓰에게 과일을 좀 나눠줬다. 아주 한 쟁반을 나눠줬다. 난 그걸 보고 좀 기가 찼다. 저 애는 독일애라서 저런가? 서양애들의 사고는 저런가? (독일인 만란을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겠다.)

  TK가 나눠준 과일 접시의 과일은 수박과 바나나였다. 수박은 자기가 먹을 수박을 사각으로 썬 후에, 둥근 껍질에 붙어 있어서 썰리지 못한 것을 한 접시 담았다. 초록의 껍질에 하얀 속살과 빨간 과육이 일대 일로 붙어 있다. 우린 이걸 수박 껍질 쓰레기라고 하지 않나? 껍질 부분을 알뜰하게 썰지 않아 빨간 부분이 좀 많기는 하다. 수박을 이렇게 썰면 잔소리 된통 듣게 생긴 그런 정도. 버리기에는 아깝고, 내가 먹기는 좀 귀찮고 한 정도. 또 바나나는 너무 익었다. 바나나 속 살이 저 정도이면, 아마 껍질은 거의 까맣게 되었을 것이다.

  메이쓰가 나한테도 먹으라며 접시를 내밀었다. 

  "아니, 먹을 시간이 지났어."

  그녀는 내가 간헐적 단식을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말을 글자 그대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속마음은 치사해서 저런 것 먹고 싶지 않다였다. 

  TK는 메이쓰에게 그렇게 한 접시 나눠주고, 자기도 저녁으로 먹을 과일을 담아와 메이쓰 앞에서 먹었다. 자기가 먹을 수박은 핫도그 만한 크기의 사각으로 늘씬늘씬하게 잘라 담았다. 그 대비를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이마에 '치사남'이라는 도장을 콱 찍어줬다.


  그래 인정, 나는 상대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내 체면 때문에 상대에게 저런 수박을 먹으라고 주지 못한다. 체면 문화가 아니고 실속 문화인 TK는 버리는 것보다는 나눠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다면, '썰다 보니 껍질에 과육이 너무 많이 남았는데, 아까워서 버리기도 좀 그런데, 너 이거 먹을래?'하고 물어봤어야 하지 않아?


  메이쓰도 그 수박을 보고 기가 찼을까? 그녀도 과일 접시에 딱히 손대지 않았다. 메이쓰는 그걸 랩으로 덮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TK가 나눠준다고 준 건데, 그걸 곧장 버릴 수는 없으니까. 

  냉장고를 열 때마다 '나는 껍질~'하고 수줍어하는 과일 접시가 보인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도 한 조각도 더 줄지가 않았다. 메이쓰도 먹을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며칠이 지나면, 바나나가 먼저 시커메질 테고, 시커메진 바나나와 같이 담긴 수박은 '버렸어야 당연했을 껍질을 누가 이렇게 쓸데없이 담아 놓았나'로 보일 것이다. 냉장고 문을 여는 내 눈에 보이듯이, TK 눈에도 보일 것이다. 

  나는 메이쓰가 TK가 없는 틈을 타서 몰래 버리지 말고, 과일 접시를 오래오래 냉장고에 뒀으면 좋겠다. TK가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자신의 치사함을 오래오래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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