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台北) 역에서 빠리라오지에(八里老街)까지(? km)
아침에 눈을 떴더니 7시가 훨씬 넘었다. 된장, 별로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아침이다. 걷는 즐거움보다 자는 즐거움이 더 크므로, 따뜻한 침대 속에서 좀 더 꾸물거리기로 한다. 여차하면 안 걷고 그냥 쉬어버리면 된다.
한 시간쯤 더 꾸물거렸나 보다. 8시가 넘어 침대를 나와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다음 길은 어디로 걸을지, 구글지도에서 여기저기를 클릭해 본다.
어제 걸었던 길을 이어서 걷자면, 진산(金山)에서 지롱(基隆)이 될 텐데, 그 구간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데, 이렇게 늦게 일어나서는 어둑해지도록 걸어야 한다. 어제까지 걸은 지점으로 돌아가는데 이미 2시간여 걸리고, 다 걸은 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또 2시간여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오늘 북동쪽 해안을 걷기는 좀 걸렀다.
출발점 딴쉐이(淡水)에서 반 시계방향으로 걸을 궁리를 해본다. 그 길은 대부분 도심을 지나가기 때문에 시간이 늦어도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지도상으로 보니 딴쉐이(淡水) 강을 사이에 두고 그 맞은편이 빠리라오지예(八里老街)다. 라오지예(老街)는 오래된 거리라는 뜻인데, 어느 지역의 라오지예(老街)라도 대체로 먹을거리 상권이 들어서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 오늘은 여기다!'
지난번 딴쉐이(淡水)에 갔을 때 보니, 이 두 지역을 잇는 교각도로를 건설 중이던데, 교각이 완성되면 걸어서 이 두 점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대만섬 일주이기 때문에 내가 걸은 선은 어쨌든 이어져야 될 것 같잖아. 대만을 떠나기 전에 교각도로가 완성되지 않으면 배로 건너서 잇는 방법도 있다.
오늘의 목표는 '타이베이(台北) 역에서 빠리라오지에(八里老街)까지 걷기'다. 갈 때 버스를 타고, 되돌아올 때 걷기로 한다.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 출발한 탓에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차를 타고 갔다가 오후에 해가 좀 꺾여들 때 걸어서 오는 방법이 더 슬기로워 보였다.
타이베이 역 근처에 도착했을 때, 빠리(八里)로 가는 버스 정류장을 찾아가다가 예쁜 빨간 벽돌 건물을 하나 발견한다. 건물이 너무 예뻤기 때문에, 무작정 들어가 구경해 본다. 구글 지도상에 '타이베이 기억 창고(台北記憶倉庫)'라고 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건축물로 그 당시 일본 기업 미쓰이(三井) 그룹이 물류 창고로 쓰려고 지은 것이란다.
버스 정류장을 찾아가는 길에 몇 걸음 못 가 또 하나의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언젠가 도심 도보여행 때 보기만 하고 지나쳐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들어가 보리라 생각했던 곳이다. 바로, 타이베이 철도박물관(國立台灣博物館鐵道部園區)이다.
'보고 가지 뭐. 이왕 늦은 거 더 늦은 들 뭐 어때.'
입장료가 100원이데, 학생에게는 반값 할인을 해줬다. 표를 끊어주는 관리원은 내 어디가 학생처럼 보였던지, 내가 표를 끊기 전에 학생이면 할인을 해준다고 특별히 알려줬다.
대만의 철도에 관한 것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다. 그걸 자세히 읽었다간 오늘 하루를 거기서 보내야 할 것이었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철도 박물관 공간을 빌려 열고 있던 공공주택에 관한 전시였다. 세계 각국에 정말로 있는 아름다운 공공주택 설계 사례를 작은 크기로 재현에 놓았다.
'공공주택도 이렇게 예쁠 수 있잖아!'
타이베이 기차역 부근에는 타이베이 기억 창고(台北記憶倉庫)와 타이베이 철도박물관(國立台灣博物館鐵道部園區) 외에도 옛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북문(北門)과 우정박물관(郵政博物館)도 바로 근처에 있다.
북문(北門)은 청시절에 만들어진 성곽 건축으로 성문만 남아있는데, 타이베이 성으로 들어서는 정문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북문(北門)은 소남문(小南門), 남문(南門), 동문(東門)과 달리, 생김새가 좀 독특하다. (서문(西門)은 소실되고 없다.) 상당히 예쁘다. 청나라 왕이 쓰던 모자를 생각나게 한다. 건륭제와 광서제의 초상화를 보면, 그들이 쓰고 나오는 모자가 있는데, 머리에 쏙 씌우는 테두리 부분은 검고, 정수리 쪽은 빨간 실을 늘어뜨려 정수리 쪽이 빨갛게 보이는 모자다. 북문의 윗 벽이 붉게 칠해져 있어서 그런지, 나는 어째 북문이 딱 그 모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북문에서 바로 바라다 보이는 우정박물관(郵政博物館台北館)도 볼만한 건축물이다. 1898년에 일식 목조 2층으로 지어졌는데, 1913년 큰 불로 소실되자, 1930년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건축가 구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의 설계에 의해 지금의 3층으로 지어졌단다. 마치 유럽 건축물 같다.
오늘의 계획 안에는 목적지까지 가는 중간에 있는 '공군삼중일촌(空軍三重一村)를 둘러본다'도 있었다. 등려군의 인생을 서술했던 드라마 단원인장구(但願人長久, 2024)에서 국민당 군인들이 대만에 와서 지낸 집단 구역인 쥬엔춘(眷村, 군부족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래서 좀 보고 싶었다. 타이베이 101 빌딩 근처에도 쓰쓰난춘(四四南村)이라는 쥬엔춘(眷村)이 있긴 하다. 규모가 좀 작긴 하지만. 공군삼중일촌(空軍三重一村)은 규모는 쓰스난춘(四四南村)보다 컸지만, 관광객이 적게 와서 그런지 관리 상태가 좀 소홀했다. 일부 건물은 음식점들이 들어섰고, 일부는 민박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건물 가운데 공터에는 중고품을 파는 시장이 열렸다. 내 보기에는 저런 걸 누가 사겠나 싶은 것들 뿐이다.
드디어, 버스를 타고 빠리라오지에(八里老街)에 도착한다. 놀랍게도 한국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만에 수년째 사는 나도 몰랐던 이런 곳을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거지?'
왜 이곳이 한국 관광객에게 핫한 관광지가 되었는지 한국인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들의 동선을 잠깐 관찰해 보니, 맞은편 딴쉐이(淡水)에서 배를 타고 와서 이곳에 내리고, 잠시 둘러본 뒤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갔다.
'오 홀! 딴쉐이(淡水)를 이렇게 즐기는 거구나!'
딴쉐이(淡水)에서 빠리(八里)로 건너오면, 배 타는 경험도 하고, 딴쉐이(淡水)에서 봤던 반짝반짝하던 야경을 보여주던 바로 그곳에 도착하는 경험도 하니까 알찬 느낌이 들 것 같다.
빠리라오지에(八里老街)에서 딴쉐이(淡水)와 다르게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점은, 첫째, 자전거를 빌려 타고 바다를 따라 쭉 이어지는 해안가 길을 달릴 수 있다. 딴쉐이(淡水)에서는 볼 수 없는 갯벌 풍경이라 나쁘지 않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간조기여서, 아이들은 갯벌에서 뭘 파내느니 하면서 놀았다. 만조 때는 또 다른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둘째, 신선한 오징어 구이를 먹을 수 있다. 오징어는 아무 양념 없이 맥반석에 말갛게 굽기만 해도 맛있어지는데, 아쉽게도 이곳 사람들은 대만식 소스를 발라버린다. 나는 이미 적응해서 못 느끼지만, 까다로운 한국인은 맛없다고 할, 대만 특유의 향이 있다. 셋째,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 먹는 쌍둥이도넛을 사 먹을 수 있다. 내가 먹어보니 뭐 대단한 맛은 아니고, 그냥 금방 만들어낸, 고급지지 않은, 싼 맛 나는 도넛 맛이다.
돌아올 때는 걸어서 돌아온다가 계획이었는데, 날은 이미 깜깜해졌고, 오면서 보니 도로는 사람이 걷기에 충분한 갓길도 없었다.
'에잇, 오늘 걷기는 걸렀다. 그냥 돌아가자!'
그리하여, 오늘의 걷기는 실패!
2024년 10월 27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