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하고 싶지 않아

by 김동해

요 며칠 동안 낯선 사람들이 나를 찾았다. 내가 뭔 달짝한 향기를 풍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언니, 논문에 들어갈 교재를 다 만들었는데, 한국어 부분을 좀 봐주세요."

'넌, 왜 맨날 날 찾니? 내가 언제 너랑 친했어?' 내 속마음은 이랬다.

스쌰오는 나의 직접적인 친구가 아니다. 이 후배는 내 친구 로빈과 친하게 지내는데, 그러다 보니 서너 번 얼굴을 마주쳤다. 그래, 딱 한번 점심도 먹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우리 사이는 이런 부탁을 하도록 가깝지 않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시간이면 될 것 같아?" 거절은 못하겠고, 그렇다고 기껍지도 않아서 괜히 까다롭게 굴어본다.

"두 시간쯤이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만나서 자료를 봤더니, 이건 잠시 앉아서 이것저것 지적해 주는 정도로 어림도 없다.

"이건 두 시간으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닌데? 집에 가져가서 해다 줄게. 한글 번역이 말이 되도록 하는 정도로 봐주면 되는 거야? 아님, 중국어 본문과 완전히 대응되는 번역이 되도록 해야 하는 거야?"

구술시험 위원 중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교수가 없으니, 너무 엄격한 수준을 요구하지는 말자고 그녀와 합의를 봤다. 어떤 일정도 안 잡힌 날은 완전히 졸업논문만 쓰고, 외출이 있는 날을 골라 집중 안 되는 시간에 틈틈이 해주마 했다. 사나흘 후쯤에나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나자, 잠도 오고 어차피 집중은 안 되겠다, 스쌰오의 자료를 오래 들고 있는 것도 스트레스일 것 같아, 빨리 처리해 버리기로 한다. 졸업논문을 쓰면서도 이렇게 집중력을 발휘 못하고 있는데, 요사이 내 모습 같지 않게 집중력을 발휘하여 해치웠다. 6시가 다 되어 간다. 무려 5시간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녀를 찾아가 결과물을 넘겼다.

'다시는 나한테 이런 귀찮은 부탁 하지 마!' 그녀에게 인쇄물을 착 넘기면서 보내고 싶었던 신호는 이랬다.


다음날 아침, 긴 문자가 띠링하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이에요. 잘 지내세요?" 시작은 이랬다.

나는 이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몰라, 프로필 사진을 클릭해 봤다. 그래도 누군지 잘 모르겠다. 문자를 다 읽어보고서야 눈인사만 하고 지내던 학교후배 진홍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자기 친구가 중국어 교재에 관해 논문을 쓰고 있는데, 그녀의 중국어 교재를 평가해 줄 만한 박사과정의 선배가 필요하여, 내게 부탁을 좀 하자는 거였다.

난, 좀 신경질이 나버렸다. 박사논문 쓰는데 집중이 안돼서 안 그래도 나 아주 예민하다고!

'아니, 왜 죄다 부탁할 일만 있으면 날 찾아?'

거절하자니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다. 나도 졸업 논문 쓰면서, 아주 많은 사람들한테 설문조사를 받았다. 그들이 그 많은 내용에 답하는 것이 참 짜증스러웠겠구나 생각하니, 나도 내 후배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진홍은 날짜를 참 잘못 선택했다. 방금 스쌰오의 부탁을 받아 반나절을 소비해서 짜증이 나는 판에, 스쌰오의 건보다 2배는 시간이 더 걸릴 부탁을 해온 것이다. 그것도 자기 것도 아닌 친구의 것을.

"그 교재가 한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거야? 나는 중국어를 가르쳐본 경험이 없어서, 적합한 평가위원이 아닐 수 있는데?"

눈치가 빠른 진홍은 '중국어를 가르쳐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며, 나는 적합한 대상이 아닌 것 같다고 답을 보내왔다.

다음에 마주치게라도 되면,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괜히 멋쩍을 것을 생각하니 미리 짜증이 났다.

'왜 내게 부탁을 해서, 내 맘을 안 편하게 하는 거야?'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또 낯선 문자가 와 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절 기억하시는지 어떤지 모르겠네요." 문자는 이렇게 시작해서 아주 길게 적고 있었다. 자기는 누구누구인데,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고, 며칠 전에 내가 누군가와 중국어 프리토킹 연습을 할 때 자기가 옆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인사를 건넸다 등등. 그가 내게 하고 싶었던 부탁은 근래에 한국어를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어떤 책으로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문법적인 부분도 좀 모르는 게 있어서 내가 자기를 좀 도와줄 수 있는지 묻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친구는 우리 학교의 언어 봉사 동아리의 회원인데, 외국인 학생들에게 무료로 중국어를 가르쳐주는 봉사를 하던 친구다. 나는 지난 학기에 이 친구와 중국어 프리토킹을 네다섯시간 진행했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갚을 차례라는 거군.' 내 속마음은 이렇게 기껍지 않았다. 하지만 답문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네가 누군지 당연히 기억해." 그리고, 일단 만나보기로 했다.


내가 선량한 사람 같아 보이기 때문에, 또 내가 까다롭게 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도 나도 내게 부탁을 한다. 돈 좀 빌려줘, 가게에 카드를 두고 온 것 같은 데 가서 좀 찾아줘, 내 논문 격식을 좀 고쳐줘, 그거 하는데 무슨 서류가 필요한지 좀 알려줘, 오늘까지 보증금 내는 날인데 나 대신 가서 좀 내줘, 등등.

처음에는 누군가를 도와줘서 뿌듯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 하지만, 쌓이고 쌓이자 유쾌하지 않아 졌다.

'내가 만만하다는 거지?'

나도 까따로운 사람이야! 날 귀찮게 하지 마!

나 게으른 사람이야! 날 움직이게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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