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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선량할 뻔

by 김동해

내 첫 번째 학생 클레어는 한 달을 수업했는데도 한글을 못 읽는다. 자음과 모음을 합한 글자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본 모음인 '이, 아, 어, 으, 오, 우' 조차도 구분을 못한다. 그냥 영어의 i, a, ʌ, ?, o, u라고 해도, 그걸 기억 못 한다. ('으'는 영어 발음 기호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나는 내가 더럽게 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닌가 반성이 되는 것이다.

클레어는 한국어로 필라테스를 가르치고, 요가복 상점에서 한국어로 고객응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을 학습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초짜 한국어 선생인 나는 자음과 모음을 휘리릭 가르치고 요가복 상점에서 오고 갈 만한 간단한 회화를 가르쳐버렸다. 회화를 녹음해서 주고 클레어가 따라 외우게 했다. 회화 속에 나오는 단어를 받아쓰기하다 보면 그냥 글자를 읽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클레어는 단어를 잘 외워오지 못했다. 하지만, 회화 문장은 곧잘 따라 해서, 받아쓰기를 너무 강요하지는 않았다.

한 달에 네 번은 직접 만나서 수업을 하고, 네 번은 전화 수업을 하는데, 어느 날 전화 수업을 하다가 영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내가 교재의 어디를 가리키는지 전혀 파악해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 마이갓! 클레어는 한글을 조금도 읽지 못하고 있어!'


다음에 면대면 수업에서는 작은 카드를 주고 학습에 필요한 단어를 직접 쓰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카드를 배치해서 문장을 만들면 클레어가 읽어내거나, 내가 말하는 문장을 듣고 클레어가 카드를 찾아 나열하게 했다.

그녀는 글자가 소리 나는 원리를 알아서 해낸다기보다는, 오늘 대충 이런 이런 발음의 단어들이 등장했고, 이 카드는 대충 이것일 것 같다는 추측성으로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클레어 씨, 글자를 보고 찾아요. 추측하지 말고요. 세 글자 중에 하나쯤은 알 수 있잖아요."

아버지의 '아', 엄마의 '마'쯤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단어 카드로 반복에 반복을 하고서야 70% 수준에서 내가 말하는 단어 카드를 겨우 찾아냈다.

'아, 이것도 방법이 아닌가 보다.'


집으로 돌아와서 한글 모음과 자음을 어떻게 가르치면 되는 것인지, 유튜브 영상들을 좀 찾아본다. '해랑한국어'라는 채널을 발견했다. 이 한국어 선생님은 영어권 성인 학습자를 가르치는데, 자기 방식대로 가르치면 1시간 안에 책을 척척 읽어낸다는 것이다. 물론 1시간 학습하고 읽어내는 수준은 거센소리랑 된소리가 포함되지 않았고, 받침도 없는 글자이긴 하다. 예를 들면, '아이가 히히히 아기 보고 히히히, 가자 가자 가게 가자, 사자 사자 오이 사자' 뭐 이런 식이다. 하지만, 그녀의 영상에서 노란 머리를 한 성인 여자가 '아이가 히히히 아기 보고 히히히'를 읽어내고는 스스로 뿌듯해하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가르쳤어야 하나?'

나도 자음과 모음을 수업 시간에 다잡아 가르쳐야 했다. 나는 내가 영어를 배울 때, 일본어를 배울 때, 알파벳이나 히라가나를 집에서 스스로 외웠던 것을 생각하고, 성인 학습자에게는 한글 자음과 모음이 어떻게 발음 나는지, 어떻게 조합하는지만 알려주면, 스스로 외워오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해 버렸다.

나의 경험 없음으로 클레어는 한 달간 시간을 낭비하고 돈을 낭비한 것이다.

'그러니, 다음 한 달 수업은 무료로 해준다고 할까?'

그렇지만, 나는 한 달간 시간을 적잖게 썼다.

'내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지 않는 거 참 기껍지 않아......'

또, 앞으로 그녀와 수업을 계속하자면, 그녀의 요구에 맞춰 필라테스 회화책도 따로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것도 적잖게 시간이 들것이다.

'내가 그녀의 특별한 요구에 맞춰 교재를 제작한다고 해서, 교재 제작비를 따로 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거기다가, 그녀는 고정된 수업 시간을 정하지 않고, 자기가 한가한 시간으로 갑작스럽게 정한다.

'나는 그녀의 편리를 최대한 봐주고 있잖아? 그녀는 나 같은 선생을 둘은 못 찾을 걸?'

한 달 늦게 시작한 두 번째 학생은 벌써 2달째 수강료를 지불했는데, 클레어는 이제 막 한 달 치 수업을 끝냈다. 일이 바쁘다고 여러 번 연기해서 그렇다.

'그녀는 벌써 한 달 수강료로, 내가 두 달이나 신경 쓰게 했어!'

이렇게 생각하고 나자, 내가 경험이 없어 잘 못 가르쳤다 하더라도, 수강료를 받는 것이 양심상 괜찮아졌다.

휴! 하마터면, 선량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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