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람이 싫은 걸까? 너무 게으른 걸까? 짠순이여서일까?
독일아가씨 만란이 여름 방학 때 한국에 오고 싶어 한다.
"동해, 너 언제까지 한국에 있어?"
"여름 방학이 시작하면 바로 가서 3개월간 한국에 있지."
"아직 한국엘 못 가봐서 이번 기회에 가보고 싶어. 너 있는 곳에 놀러 가고 돼?"
이런 소리를 들을 때 처음으로 딱 드는 느낌은, '나'라는 사람을 사귀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인 사람을 사귀려 한다는 반감이다. 사람들이 외국인 친구를 갖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나라에 놀러 가면 아는 사람이 있어 찾아가 볼 곳이 생긴다는 이점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나조차도 그런 마음이 있으니, 반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데, 나는 그 마음을 눌러두는 것이 잘 안 된다.
만란과 나는 오육 년째 친구다. 만란이 '한국인'인 나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한국에 놀러 오겠다는 소리를 들으면 드는 첫 반감은 그녀를 향해서도 올라왔다.
요새는 한국에 대한 평가가 높아져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을 친구로 사귀고 싶어 한다. 좀 주책맞은 사람들은 나랑 전혀 친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한국인이라는 나를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벌써 한국 여행을 꿈꾸며 '너한테 놀러 가도 돼?'하고 묻는다. 내 속마음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 우리는 그냥 얼굴을 몇 번 봤을 뿐이야.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오지 마!'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은 너무 귀찮다는 것이다.
'만란, 너는 너무 까다로운 여행객이야. 난 널 감당할 자신이 없어.'
만란은 어지간한 숙소에 만족하지 못한다. 예뻐야 하고, 깨끗해야 하고, 맘대로 요리할 수 있는 주방이 있어야 한다.
"내 집은 지금 세를 줘놨잖아. 방학 때 한국 가면 나도 시골 엄마집에서 지낸다고. 내 집이 있을 때 놀러 와."
"도대체 그게 언젠데, 그러다 영영 못 가보겠다. 내가 따로 숙소를 얻을게. 널 귀찮게 하지 않을게."
만란의 귀찮음은 숙소뿐만이 아니다. 채식요리 예술가 만란이 하고 싶은 여행은 한국 텃밭에서 자라는 채소들을 직접 따와서 요리를 하고, 한국 시장에서 각종 식자재를 구경하고, 한국의 채식 요리가가 여는 쿠킹 클래스에 참가하고 이런 것이다.
"내가 사는 시골은 5일마다 한 번씩 시장이 열려. 식자재를 사고 하는 일도 편하지 않아." 이렇게도 이야기해 보고.
"쿠킹 클래스 같은 건 서울에는 있을 텐데, 내가 사는 시골이나 가까운 도시 대구에서는 찾기 힘들 거야." 또 이렇게도 이야기해 보고.
"우리는 밭에 뭘 심지 않은지 오래됐어. 네가 와서 씨 뿌리는 것부터 시작해." 그래도 꼭 오고 싶다니, 이렇게 한발 물러선다.
이런 것들이 다 해결된다고 해도, 매 끼니도 문제다. 만란은 계란도, 우유도, 마늘도, 파도, 양파도 먹지 않는 베지테리안이다. 한국에서는 손님을 대접할 때, 고기요리가 가장 간단하면서도 푸짐한 메뉴인데, 고기를 먹지 않는 만란에게는 뭘 대접해야 하느냔 말이다.
'만란, 한국에서 넌 먹을 게 없어, 오지 마!'
한국의 어느 식당에서 마늘을 빼고 요리를 하더냔 말이지.
"한국에도 채식 식당은 있을 거야." 만란은 채식 식당이 없는 나라가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있긴 있겠지. 하지만, 이따만한 넓이의 도시에 한 두 개 있다면, 그걸 있다고 할 수 있겠어? 밥 먹으러 채식 식당 찾아 삼만리 해야 한다면 그걸 있다고 할 수 있겠냐고?"
또, 만란은 나와 돈씀씀이가 다르다. 아시아 보다 물가가 비싼 독일에서 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만에서 개인 베지테리안 키친을 운영하기 때문에 자기가 사장이고 종업원인 1인 사업자라 돈을 곧잘 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타이동에서 혼자 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 살고 있다. 물론 타이동은 타이베이와 달리 물가가 싸긴 하지만. 빨간 자가용도 하나 끌고 다닌다. 그것도 물론 중고이긴 하지만. 부자인 그녀는 음식을 주문할 때 가격 같은 거 고려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녀에게는 어떤 재료가 들어갔다는 건인지만 중요하다.
그녀와 여행을 하자면, 함께 소비를 하게 될 텐데, 짠순이인 내가 그녀의 소비를 따르자면 적잖이 속이 쓰릴 것 같은 것이다.
더 결정적으로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어서 상대에게 맞춰주는 여행을 잘 못한다. 나는 내 스타일대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입 다물고 무한히 걷고, 걸어서, 걸어가는 여행. 여행 스타일이 맞지 않는 그녀와 여행하다가 사이만 틀어지고 말지 모른다.
'만란, 우리 그냥 좋은 친구로 지내게, 그냥 오지 마, 제발!'
만란은 벌써 한국에 놀러 오겠다는 말을 여러 번 꺼냈다. 이번에는 진짜일지도 모른다. 대만 정부에 신청한 자유 예술가 공작증(工作證)을 받지 못하면, 대만에서 일할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귀국을 선택해야 하는데, 귀국 전에 대만에서 가까운 아시아 국가들을 둘러보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한국에 오지 말기를 기원하는 것보다 그녀가 순조롭게 공작증을 획득하도록 기원하는 게 나으려나? 공작증이 나오면, 그녀는 일하느라 바빠서라도 한국 여행할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하늘님, 제발 만란이 자유 예술가 공작증을 받도록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