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현대인들은 지갑을 열어 돈을 쓰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나는 다행히 그 현대병이 없다. 내게 뭔가를 산다는 것은 막강한 스트레스이고, 평온한 삶을 위해 되도록이면 뭘 사지 않는 삶을 산다.
일본에서부터 유행한 단어 단사리(斷捨離)를, 미니멀라이프라고 하면 더 쉽게 다가오려나?, 나는 이걸 별 노력 없이 실천하고 사는 편이다. 거짓말을 조금 보탠다면, 세상 어디로 떠나더라도 여행가방 하나면 내 인생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담는 게 가능하다. 이 얼마나 나이스(nice)한가 말이지.
하지만! 이건 결정장애라는 병, 선택불능이라는 병이 심해서 나타난 결과다.
뭘 사려고 하지 않으면 내 병은 드러나지 않는다. 대만 생활을 하면서는, 한국으로 돌아갈 때 다 버려야 하는 물건이 되기 때문에, 거의 아무것도 사지 않고 살면서 내 병은 드러날 새가 없었다. 나는 마치 다 치유된 듯 자신감에 차있었다.
하지만! 노트북이 물을 마시고 죽어버려 다시 사야 했을 때, 내 병은 치유되기는커녕 더 심각해진 것으로 드러났다.
나는 새 컴퓨터를 사는데 무려 8개월이 넘게 걸렸다.
대만에서 한국어 자판이 아닌 컴퓨터를 사면 나중에 조카들에게 물려주기 나쁘다는 이유로 사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댔다가, 여름 방학에 한국에 돌아와서도 사지 못했다. 2023년도에 출시된 갤럭시북 3 시리즈가 내가 컴퓨터를 사는 첫 번째 조건 '예쁠 것'은 충족시켰으나, 두 번째 조건, '가볍고 화면은 클 것'에 적합한 것이 없었다. 겨우 만족할만한 무게면 화면이 작고, 화면이 크면 노트북이라 하기 민망하게 무거웠다. 막 사망한 내 노트북은 15.6인치 화면에 1.18kg으로, 이 두 조건을 충족했더랬다.
그래 한국에서 보내는 3개월의 여름 방학 동안 하나를 못 골라서, 결국은 남동생이 싼 맛에 사놓은 레노버 컴퓨터를 빌려 썼다. 레노버 노트북의 무게가 1.76kg쯤 되는데, 이게 살까 말까 했던 갤럭시북 3 시리즈의 1.46kg과 뭐가 다를 게 있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는 무게로 판단하는 게 아니란 것을 좀 써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냥 인터넷 검색용으로 몇 시간쯤 쓰고 나면 컴퓨터는 이미 절약모드로 돌입하면서 모티너화면의 밝기를 자동으로 줄여버렸다. 그러니 언제 배터리가 바닥날지 몰라 늘 충전기를 들고 다녀야 했다. 한 학기 동안 무거워서 아주 애를 먹었다. 두꺼운 소설책 예닐곱 권을 가방에 넣어 다니는 무게였다고나 할까.
다시 겨울 방학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불편해 죽을 뻔한 고생을 기억하여 노트북을 겨우 샀다! 사고도 제대로 산 게 맞을까 고민스러워하면서 두 달여를 박스를 뜯어보지도 않았다가, 대만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와서야 뭐 어쩔 수 있나 하면서, 박스를 개봉하고 쓰기 시작했다.
열 번 양보해서, 컴퓨터 같은 건 적잖은 돈이 들고, 한번 사면 몇 년간 써야 하는 것이어서, 결정을 하는데 부담스러울 수 있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누구나 결정장애를 겪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러면 비싸지 않은 물건을 살 때나 금방 쓰고 버릴 물건을 살 때는 결정장애를 겪지 않느냐 하면..... , 그렇지가 않다. 똑같이 결정장애를 겪는다.
안경다리가 부러져 새 안경을 사야 했을 때도 나는 내 모습이 싫어 죽을 뻔했다. 집 근처에 있는 안경점 여섯 군대를 다 돌아봤고, 내일모레 대만으로 돌아가야 하니 더는 고르고 따질 시간이 없어져셔야 겨우 고르고는, 하룻밤만에 마음이 바뀌어 다음날 다시 안경테를 바꿨다. 다행히 사장님이 공짜로 안경테를 바꿔줬다. 렌즈는 다시 써먹을 수가 없어서, 아깝게도 렌즈값만큼은 날려먹어야 했다.
만원도 안 하는 매해의 다이어리를 고를 때는? 물론 그것도 오래 고민한다. 겨우, 어떤 사이즈의, 얼마만 한 두께의 것을 살 지 결정했는데, 선택해야 할 색상이 무려 열두서너 개쯤 되는 것을 보면 딱 질려버린다. 그리고 색상 하나를 정하는데 며칠이 걸린다.
'아니 수첩 회사 사장은 왜 이런 결정권을 소비자한테 넘겨서 소비자를 괴롭히냔 말이지. 오랫동안 봐도 안 질리는 검증된 색상 몇만 생산해서, 소비자가 어느 걸 골라도 질리지 않게 해 주면 왜 안 되는 거래?'
유튜브 영상에서 봤는데, 결정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완벽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또는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심리 때문에 심적 갈등을 겪는다는 것이다. 좋게 표현하면, 선택장애가 있는 우리들은 선택을 한 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선택을 최대한 신/중/하/게 하다 보니 곤란을 겪는 것이란다.
그깐 노트북도, 안경테도, 수첩도 하나 못 고르는데, 내가 내 짝인들 어떻게 고를 수 있겠나. 그러니, 이 나이가 되도록 혼자인 게 훠까이(活該)*한 것이다. 나는 내 짝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으면 좋겠고, 그래 결정장애를 좀 고쳐볼 생각이다.
'내 선택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냥 잘못 선택한 책임을 지기로 하자! 조금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선택도 하기 전에 바둥대지 않기로 하자!'
*훠까이(活該 [huógāi]) : 동사 1.(… 한 것은) 당연하다. 그래 싸다. 마땅하다. 통쾌하다. 고소하다. 2. 마땅히 … 해야 한다. (… 하는 것이) 마땅하다 [당연하다]. [숙명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