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다!

메세타고원에서 만난 경연 씨

by 김동해

2012년 9월 4일 화요일

날씨 : 맑고, 바람 붐

걷기 :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에서 프로미스타(Fromista)까지 (25.5km)


알베르게에서 제공해 준 아침을 먹는다. 오스피탈레로가 이탈리아 아가씨라서 그런지, 빵이 아니고 비스꼬띠를 내놨다. 비스꼬띠(Biscotti)는 식빵을 바삭하게 구운 것인데, 비스킷과 빵의 중간쯤 되겠다. 빵은 유통기한이 짧지만 비스꼬띠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빵이 없을 때의 비상용으로나 유용하지, 적어도 내게는 빵의 대용식은 못된다.

옆자리로 와서 앉는 히토시 씨에게 어제 먹다 남은 버터를 나눠줬더니, 그는 과일을 요것조것 반쪽씩 나눠준다. 난 또 그것을 반 잘라 내 앞에 앉은 아르헨티나 여자에게 나눠준다. 그걸 보면서도 그는 먹기 좋게 껍질을 깎아서 하나씩 하나씩 내게만 건네준다. 나는 또 아르헨티나 여자에게 반을 준다. '네가 그걸 어떻게 하든 그건 네 뜻이고, 나는 네게 준다.'이다. 히토시 씨의 다정함에 마음이 흐뭇하다. 히토시 씨가 내 또래였더라면 그에게 집중하느라 마음 따로, 발 따로, 여행을 다녔을 것이다. 걷기에 집중하게 해 준 그의 늙은 외모에 감사를!


간밤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났다. 하루 밤에 꾸는 꿈은 다 똑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 한 번은,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웃다가 내 웃음소리에 일어났고, 한 번은 새집에 홍수가 나서 놀라 일어났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꿈이다. 이 길에서 좋은 일이야 사람밖에 더 있겠나. 오늘 누군가가 등장하겠다는 예감을 가지고 일부러 주황색티를 입는다. 이건 만약을 위해 가져온 면 재질의 티라, 마르는데 시간이 걸려 잘 입지 않다가 행복한 색이 입고 싶어 오늘은 특별히 입는다.


지금껏 중에 가장 빨리 출발한 날이었다. 깜깜할 때 걷는 기분도 괜찮았다. 30여분 걸어 모스델라레스(Mostelares) 고개에 오른다. 그곳에 오르면 방금 걸어온 가스트로헤리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고개에 다다랐을 때 해가 떠오른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한국의 일몰 때 같은데, 이건 스페인의 위도가 우리보다 높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얼마 안 가서 저 혼자 뚝 떨어진 조그마한 돌 벽돌집을 보게 된다. 두 나무에 빨랫줄을 걸고, 포도주색 시트를 널어 바람을 치이고 있었는데, 거기도 조그마한 알베르게였다. 이런 곳이 있는 줄 알았으면 어제 분명히 더 걸었을 것이다. <산 니콜라스 데 뿌엔떼 이테로 호스피탈 데 뻬레그리노스(San nicolas de puente itero hospital de peregrinos)>라는 나무 문패가 걸려 있다.

중세 로마제국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다리도 하나 지난다. 이게 이테로(Itero) 다리였다. 강폭에 비해 다리가 과장되게 길게 만들어진 느낌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량이 줄어 그렇게 보이나? 스페인에서 만난, 역사 깊은 다리들은 대부분 가운데가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처럼 쏟은 형태에 다리발은 아치형이다.


부르고스 이후부터는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고 했다.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이고, 바람이 휘휘 부는 것을 보니 확실히 고원을 걷는다는 걸 알겠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도 사방의 한쪽쯤은 아스라이라도 산이 보이지 않나. 해발 800미터의 스페인 메세타고원은 어디를 봐도 지평선이다.

메세타 고원이 밋밋하여 사람들이 차를 타고 건너뛰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전혀. 사방이 탁 트인 그 느낌이 너무 좋다. 그 광활한 속을 걷고 나면, 나도 통 큰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착각을 하며 행복해한다.

바람에 날리는 손수건을 얼굴로 끌어당기며 걷노라니, 뒤에서 누군가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한다. 내 마음에 웃음이 배시시. 이치가 오늘 등장하리라 예감되었던 그치인가 보다. 멀리서부터 내가 한국인인 줄 알았단다. 햇볕 차단을 위해 꽁꽁 싸매고 다니는 사람들은 일본인과 한국인뿐인데, 팔 토시를 하고, 캡모자에 손수건을 걸어 그늘 막을 친 폼이 한국인 같더란다.

그치도 모자와 선글라스로 무장을 했다. 너무 어려 보여 '남/자/다/!'의 반가움이 조금 깎이려는데, 무려 몇 년생이란다.

'몇 년생이 저렇게 어려 보이나?'

나는 올 들어 아줌마인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졌는데,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 그는 청년이다. (나중에 무장을 푼 모습은 그의 나이처럼 보였다.)

그는 나보다 하루 늦게 출발했고, 나보다 하루 늦은 29일 파리를 통해 돌아간단다. 서울 사람이지만 집안이 강원도 출신이라 강원도 말투라고 했다. 제주도 올레길을 갔다가 산티아고를 알게 되었단다. 나와 출발 계기가 같다. 그는 걸음이 빨라 나를 앞서갔지만 다시 보게 되리란 걸 알았다.


프로미스타(Fromista)가 가까워서는 정말로 긴 까스티야(Castilla) 운하를 따라 걷게 된다. 앞을 보자면, 길과 강이 비슷한 폭으로 지평선으로 끝까지 나란히 뻗어 있다. 시선을 운하 쪽으로 돌리면, 바람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헷갈리는 운하가 있고, 강 제방에 날씬한 물풀들이 바람에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고, 그 뒤로 올해의 경작이 끝난 농토가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다.

하늘과 나무의 조화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계속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렇다고 그 느낌을 다 담을 수는 없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대어 나뭇잎들이 사그락 사그락 부비는 소리와 앞면 뒷면으로 뒤집히며 반짝이는 모습을 내가 무슨 수로 담으리.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도 분명 있는 나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어떤 하늘색을 배경으로 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 보일 수가!


마땅한 바가 없어 나는 쉬지도 않고 걸었다. 화장실에 가야 했으므로. 길에서 볼일을 본다고들 하는데, 순례자들이 늘 걷고 있고, 대부분 사방이 확 터진 길에서 적어도 내게는 그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한두 시간 안에는 마을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화장실 때문에 곤란을 겪은 것은 오늘뿐이다. 사실, 오다가 슈퍼마켓 겸 바를 분명 만났으나 커피머신이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쳤었다. 제대로 된 바에서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시겠다는 욕심으로 말이다. 나의 커피 사랑은 이다지도 지극하다.


경연을 다시 만나 프로미스타에 같이 도착한다. 아침에 만난 남자의 이름이 경연이다. 공립 알베르게가 7유로다. 한동안 도네이션 알베르게만 걸렸던 탓에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샤워룸에 문이 없는 것은 적응되었고, 찬물과 뜨거운 물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는 것은 영 불편했다. 대부분은 뜨거운 물의 양과 차가운 물의 양을 밸브로 조절해서 버튼을 누르면 알맞은 온도의 물이 쏟아지는 식이었는데, 이곳은 뜨거운 물 버튼과 차가운 물 버튼이 따로 있었다.

점심을 안 먹었던지라 배가 억수로 고프다. 뭐든 먹어야 씻을 기운이 나겠다. 가방만 던져두고 사거리에 있는 바에서 닭고기가 들어간 보까디요를 맥주와 함께 먹는다. 뽀요(pollo) 보까디요는 닭 가슴살 햄버거보다 훨씬 맛있었다. 지금까지는 안전하게 또르띠야(Tortilla) 보까디요를 자주 먹었었다. 또르띠야는 잘게 썰어 익힌 감자에 계란을 풀어 케이크처럼 두껍게 익혀낸 것인데, 한국인 입맛에 딱이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야심 차게 또르띠야를 요리해서는 조카들 앉혀놓고 먹기를 강요했다. "이모, 별로 맛없는데요?", "고모, 나도 별로 맛없다."의 평가를 받았다. 나의 구황 음식이었거늘.)


나는 이곳에서 멈추었지만, 어떤 순례자들에게는 지나가는 마을이다. 그들도 잠시 멈춰 이 바에서 요기를 한다. 보까디요 하나를 다 먹도록 내가 아는 순례자는 한 명도 지나가지 않는다. 어쩜.

프로미스타에는 파리가 엄청 많다. 생선가게 파리들 마냥 첩첩하게 달라붙어서는 손바람으로는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파리가 우글거리는 마을은 여기가 유일했다. 소똥이 쫙 깔린 갈리시아 지방에서도 이런 파리는 없었다.

누군가 내일 간식 장만을 위해 슈퍼마켓에 간단다."같이 갑시다."가 되어 떼 지어 슈퍼마켓 나들이를 간다. 비스킷 하나와 과일 둘을 샀다. 경연은 '저걸 다 어떻게 들고 가려고 하나' 걱정이 되도록 많이 사더니, 하나씩 나눠준다. 열홍쌤은 내게 바나나를 나눠준다. 알베르게 앞 광장 벤치에 앉아, 나도 내일 먹으려고 샀던 비스킷을 푼다.

내가 발이 아프다 했더니 경연이 맨소래담을 바르라며 준다. 잔뜩 나와서 잔뜩 발랐는데, 이런 게 효과가 있으려나?

벤치에 앉아 볕을 쬐고 있자니, 며칠째 얼굴을 봐오던 여인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나는 그녀가 미국인인 줄 알았다. 그녀가 영어 쓰는 것만 봤고, 그녀의 외모에서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쥬느비에브(Genevieve)'라는 그녀의 이름을 듣고서야 프랑스인인 줄 안다. '쥬느비에브'는 프랑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감성적인 이름이 아닌가. 그녀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 출신인데 영어를 제법 잘했다. 경연과 내게 제대로 된 여행을 하려면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영어를 배우라고 조언한다. 안다. 영어, 스페인어만 알아도 세계여행이 즐거위질 것이다.

'걷기' 다음으로 '스페인어 공부'에 목적을 두었었는데, 생각만큼 공부가 잘되는 것은 아니다. 육체의 피로 때문이랄까. 심플한 패턴의 일과로 미리가 단조로워지기 때문이랄까.


오늘 지녁은 얼홍쌤, 남학생 하나, 경연, 기업가 아저씨, 나, 이렇게 모여 먹었다. 10유로짜리 필그림 메뉴, 맛없다. 아니 너무 짰다.

새로 등장한 기업가 아저씨는 별로 유쾌한 스타일은 아니다. 뭐 그렇다고 과히 기분 나쁜 스타일도 아니다. 이 아저씨는 지난해에 자전거로 이 길을 다녀갔고, 올해는 걸어서 간단다. 내게 여행이 처음이 아니신 것 같단다. 무슨 글 쓰시는 유명한 분이 아니시냔다. 이건, 그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는 선에서만 이야기하기에, 혹시 우리가 대단히 유명한 기업가를 만난 것이 아니냐고 농을 던졌기 때문에 되돌아온 말이다. '작가'가

아니냐는 말에 기분은 좋았다, 나한테 그런 신비한 분위기가 풍기나 하면서.

아저씨는 다른 바에서 맥주 한잔 더 하잔다. 이 길 위에서 쓰기 좋은 전략, 피곤을 가장하여 나는 빠진다. 경연은 기업가 아저씨와 한잔 더 하겠단다. 누구에게도 친하게 다가가는 저치의 취향 없음은 뭐야. 하긴, 순간에 배척할지 친하게 지낼지를 결정하는 나는 또 뭐야.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이 아저씨의 블로그를 발견했다. 프로필에도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아 끝내 이름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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