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러 미련스럽게 걷고 있나

아! 집에 가고 싶어

by 김동해

2012년 9월 6일 목요일

날씨 : 쾌청, 바람 불다

걷기: 까리온(Carrion)에서 테라디요스(Terradillos)까지 (26.6km)


간밤에 한숨도 못 잔 것 같다. 7시가 되자, 오스피탈레로가 인사를 하며 방의 불을 탁 켜고 간다. 이것은 낮에는 볕이 뜨거우니 '일찍 출발하시오'가 아니라, 빨리 일어나 '나가라'는 뜻이다. 드글드글한 간지러움이 좀 사라지길 바라며, 일어나 또 샤워를 했다.

어제저녁에 장을 본 것이 있어 아침을 먹고 나가야 했다. 아침을 먹으며 간밤에 일이 난 팔을 보여주며 이게 알레르기일지, 벌레의 소행일지 물어본다. 한국 아주머니께서 같은 흔적을 보여주시며 베드버그 일거란다.

"알레르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초저녁에 잠시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온몸에 부글부글 올라왔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래도 내보기엔..."

아주머니가 보시기에는 베드버그가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희망을 뭐 그렇게 똑 꺾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을 얼버무리고 마신 것이다. 착잡.

8시가 되자 '당장 나가라'는 압박의 종을 땡땡땡 오래도록 시끄럽게 쳐댄다. 나는 급히 서둘러 나온다. 한국인 가족 넷은 종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어제 발이 너무 아파 마을을 전혀 구경할 수 없었다.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참 예뻤다. 그 마을을 빠져나오자 직선의 메세타고원이 지루하도록 끝없이 이어진다. 18km 동안 마을이 없을 것을 알고 먹을 것을 충분히 가방에 챙기긴 했다. 그러나 이 18km는 너무도 지루한 길이었다. 차선과 나란히 일직선으로 쭉, 그냥 쭉, 저쪽 마을까지 변함없이 뻗어만 있었다. 변화 없고, 마을 하나 나타나지 않는 길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나는 어젯밤 간지러움에 치를 떨며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렸고,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어졌다. 이 18km 구간을 걸으면서 내 기분은 더 비참해진다. 자동차며 비행기며 최신의 기술들이 있는데 뭐 하러 미련스럽게 걷고 있나, 뭘 얻겠다고!

한참을 이렇게 지쳐 자조적으로 걷고 있는데, 문득 그 답이 떠올랐다. 자신감. 내게는 '자신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걸 겨우 40여 일 만에 얻을 수 있다면 정말 값싸게 얻는 것이 아니겠나. '자신감'이라는 것은 수년의 세월 동안 쌓여서 얻어지는 법인데, 40여 일의 완주가 가져다줄 수 있다면야 나는 생고생을 하며 걸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침체되어 있고,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므로.


힘든 18km 구간 후에 첫 번째 마을을 만난다. 건너뛰고, 두 번째 마을도 건너뛴다. 26km 지점의 마을에서야 지쳐서 멈추어 선다. 약국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걸었던 것이다. 이곳에는 알베르게가 둘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알베르게는 마을 초입에 있다. 두 번째의 마을 안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가려다 한국 아가씨가 돌아 나오는 것을 본다. 저쪽 알베르게가 문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는 걸을 기운도 없었는데, 그

녀 덕에 헛걸음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 우리는 같은 알베르게에 짐을 푼다.

마을에는 약국이 있을까? 밤새 긁적이다 '아! 집에 가고 싶어'가 되지 않으려면 약국을 갔다 오자. 오스피탈레로에게 물어보니 사하군까지는 약국이 없단다. 된장! 내 팔을 보더니 어디서 그랬냔다. 까리온의 수도원에서 그랬다고 하니, 안 됐다며, 약은 없지만 알코올로 소독해서 간지러움을 잠시나마 가라앉혀준다.

사립 알베르게 주인들은 베드버그에 물렸다고 하면 침대를 안 내주는 경우도 있단다. 내가 베드버그가 가려운 줄만 알았지 놈들의 악행을 몰랐던지라 베드버그에 물린 것을 무슨 훈장인 냥 보여주고 다녔다. 약 없이 오늘 밤 잘 수 있을까?


8인실 방에 아는 얼굴이 둘이다. 한국 아가씨와 이탈리아 할아버지 프랑코.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프랑스 할머니가 괴롭게 토하고 있다. 저렇게 다 토하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국 민간요법을 이용하여 좀 도와주겠다고 한다. (내게 체기를 다스리는 능력이 좀 있다.) 그녀의 등을 만져보니 체한 것 같다. 이게 거짓말 같지만, 등을 두드려 보면 상대의 기운이 내게로 전해져 체기를 알 수 있고, 체기를 내릴 수도 있다. 나도 트림을 끄억끄억 하면서 그녀의 등을 두들겨준다. 내 귀신적 감각으로는 속이 아직 시원하게 뚫린 것이 아닌데, 그녀가 내 손길을 너무 아파해서 그만 멈춘다. 그녀가 "느낌은 완전히 괜찮아졌고, 너무 오랫동안 아팠던지라 조금 피곤할 뿐이다, 매우 고맙다."라고 한다. 그녀는 이틀째 같은 알베르게에서 꼼짝없이 앓고 있었다. 그녀는 한밤중에 한 번 더 토하고는 꾀병처럼 나아, 다음날 아침에는 걸어서 갔다.

그녀는 한국의 민간요법 때문에 나아졌다고 느낄까? 나는 '코리안 트레디셔널 메서드(Korean traditional method)라고 했고, 그들은 '마사지(massage)'라고 했다. 일종의 기(氣) 치료인데, 물질적인 마시지에 비교될까. '스피릿(spirit)'이라는 단어만 생각났어도, 한국 민간요법의 신비성을 제대로 포장해 주는 거였는데.....


이탈리아 아줌마, 프랑코 할아버지, 국적이 기억 안 나는 한 아가씨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나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으려는데, 처음 보는 이탈리아 아줌마가 같이 먹자며 나를 불렀다. 그녀는 내가 이태리어를 할 줄 안다는 말에 매우 반가워했으나, 삼성이 다른 제품을 카피(copy)하는 것에 대해 도전적으로 따져 물었다. '나도 삼성 싫어해.' 어제 만났던 기업가 아저씨는 국위 선양은 경제인들이 다한다고 했다. 이 아줌마와 그가 만났어야 하는 건데.

내 목에 흐르는 땀을 누군가가 닦아주는 꿈을 꾼다. 이것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의 뜻? 누가 어떻게 도와줄 것인지 내일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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