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bed)버그
2012년 9월 10일 월요일
날씨 : 맑음. 어젯밤 천둥소리와 빗방울 소리를 들은 듯하다.
걷기 : 레온(Leon)에서 빌랴 데 마자리페(Villa de Mazarife)까지(?km)
산타 마리아 데 까르바할(Santa Maria de Carbajal) 알베르게에서 기부제로 제공하는 아침을 먹는다. 버터가 없다는 것이 늘 아쉽지만 양껏 먹도목 제공된다는 것은 좋다. 순례자들에게 먹는 것으로 야박하게 구는 곳은 에마우스가 유일했다.
어제 사위실에서 캐럴을 만났었다."경연이 그러던데, 네가 차를 타고 가며 인사했다더라?" 그녀, 펄쩍 뛰며 자기는 걸어왔단다. 오늘도 그녀는 제일 늦게 출발할 양으로 늑장을 부리고 있는 것을 보며 알베르게를 나왔다. 가장 늦게 출발하면서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고, 길 중간에서는 한 번도 만나지지 않는 그녀의 정체는 뭐야? 누군가는 필그림 숙박료가 싸기 매문에 걷는 척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유형이 아닐까라고 이야기했다.
산 마르꼬스(San Marcos)를 또 지나가게 된다. 어제는 급한 마음이었고 오늘은 이 보다 한가할 수 없는 마음으로 벤치에 앉아 청동 순례자상 마냥 고개를 꺾어 올리고 하늘과 건물을 감상했다. 앉아 분위기 잡고 있자니 춥다. 그래서 다시 걷는다. (산 마르꼬스는 후기 고딕 양식,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 이슬람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란다. 이슬람의 흔적은 알람브라 궁전처럼 남부에만 남아 있는가 했더니, 스페인 북부에도 이렇게 남아 있다.)
드디어 페이터가 나올 거라던 갈림길이 나왔다. 어로 갈까? 아름다운 길을 택할까, 짧은 길을 택할까, 결정을 못하고 섰는데, 한 부부가 지나가며 그렇게 많이 더 길지는 않다고 말해준다. 그래 그럼 아름다운 길로 가는 거지 뭐.
분명 이 길을 걷는 자들을 위해 일부러 만들었을 길가 테이블에 앉아 뭘 좀 먹고 가기로 한다. 빵에 잼을 발라 먹는다. 산토도밍고 이후로 잼을 배낭에 넣어 다니고 있다. 잼은 유리병에 담겨있어 무겁지만 스페인의 것을 종류별로 맛볼 생각을 하니 무거운 것이 참아졌다.
한 여자가 내 옆에 가방을 벗으며 가이드북을 특 내려놓는다. '술라(Sulla)~'하는 단이가 보인다.
"너 이태리인이냐?"
"그래"로 시작하여 그녀의 말이 시작된다. 내 이야기를 키 큰 이탈리아 아줌마한테서 들었단다. 수건으로 얼굴에 그늘을 지우고 다니는 것을 보고 내가 바로 그 아이란 결 알았단다. 키 큰 이탈리아 아줌마와 저녁을 같이 먹었었는데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었단 말이지. (삼성이 카피한다고 불평했던 분이시다.) 도대체 나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또 나의 피해망상이 시작된다. 얼굴이 햇빛에 그으는 것에 너무 신경을 쓴다고 했을까? 이태리어도 영어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고 했을까? 유쾌하지 않은 아이라고 했을까?
그녀의 편안한 분위기는 나의 피해망상증을 이쯤에서 멈추게 한다. 이렇게 저렇게 생긴 한국 여자애가 이태리어를 할 줄 알더라, 너도 만나게 될 거야, 뭐 이 정도 아니었을까로 생각을 고쳐먹는다.
새로 만난 이탈리아 여인의 이름은 맛달레나(Maddalena)이다. 오페라 중에 '막달레나'가 있지 않나?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길었지만 단번에 외웠다. 다만 그녀가 '막'달레나가 아니라 '맛'달레나라고 고쳐줬다. 그녀는 이탈리아인이지만 몇 째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단다.
내가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이틀 전에 발이 너무 아파 이렇게 저렇게 처리했단다. 딱딱한 깔창으로 바꾸었는데 무려 35유로나 줬단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고 나니 걷기가 훨씬 편해졌다며 너도 그러란다. 아니면 자기가 빼놓은 물렁한 깔창이라도 가지겠냔다. 그녀의 깔창은 정말이지 무슨 젤리처럼 물렁했다. '아니, 난 우선 네가 말한 대로 약국부터 가보겠어. 그런 후에도 호전이 안 되면 깔창을 사겠노라' 말해준다.
그녀는 길 건너의 바에서 점심을 먹고 간다 하여 우리는 일단 헤어진다. 나는 그녀가 그냥 또 마음에 들었다.
어디선가부터 다시 맛달레나와 나란히 걷고 있자니, 조금 전 한 동네에서 만났던, 자전거로 여행 중인 스페인 할아버지가 네 것이 아니냐며 스틱 하나를 건넨다. 스페인 부부의 것이 아닐까 싶다. 길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고, 가지고 가다 보면 만나지겠지 싶어 내가 맡기로 한다. 마자리페(Mazarife)에 거의 다 도착하여 그 스페인 부부를 만난다. 전해주었더니 그녀, 고맙다며 뽀뽀해 준다. 뭐 그만 일에!
마자리페에는 알베르게가 셋 있다. 어딜 갈까? 이런 것이 제일 고민스럽다. 5유로라고 써진 알베르게에는 수영장이 있어 이미 젊은 애들이 신나게 즐기고 있다. 피하고 싶다. 그래서 정원이 예쁜 두 번째 알베르게로 들어간다. 먼저 앞서 걸어갔던 맛달레나도 세 번째 알베르게까지 갔다가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녀가 마음에 안 들었다니 이곳이 더 나은 알베르게인 것이 맞나 보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자기로 한다.
상천의 말대로라면 빈대가 아직도 내 가방에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 침낭을 햇볕에 널고 옷가방까지 빨았지만, 한 뭉치의 또 다른 옷가방을 어찌할꼬? 또 그런들 배낭 속에 숨어있다면 말짱 도루묵이며,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어쩔 것이며..... 상천의 말대로 완전히 싹 버리지 않는 이상 없어지려나 싶다.
이 별레에게 물리면 너무 간지러위서 '배드(bad) 버그'인 줄 알았는데, 더러운 침대 매트리스에 꼬여든다고 해서 '베드(bed) 버그'이다. 우리나라 육십 년대에나 있었던 빈대 같은 놈이란다. 우리나라에도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있듯이, 이곳도 베드버그가 한번 생기면 싹 버리고 이사하지 않는 한은 잘 제거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베드버그는 지금 물리고 당장 가려운 것이 아니라, 잠복기를 거쳐 며칠 뒤에나 가렵기 시작한단다. 그러니, 내가 베드버그에 물린 것은 까리온의 수도원이 아니라, 오르니요스 까미노의 체육관이었을 수도 있다.
빈대의 속성이 이럴 것이면 베드백에 물린 사람을 좋아라 하지 않는 것은 인지상정일터. 나는 팔뚝을 가릴 수 있는 바람막이 점퍼가 마르길 기다리고 있다. 긴 팔 옷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으니 그걸 입고서야 나가겠다. 오늘 이 알베르게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새로운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내가 '벌레 물린 아이'라는 낙인이 찍히도록 할 수 없다. 비록 정원이 예쁘고, 7유로씩이나 주고 이곳에 미무는 것은 정원도 즐겨야 한다는 뜻이
지만, 나는 지금 다소 어둑하여 벌레 물린 팔이 잘 드러나지 않는 아래 칸 침대에 누워있다. 맛달레나에게는 발이 아파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해둔다.
"그럼 그럼, 넌 지금 많이 쉬어야 해."
맛달레나는 내게 발 마사지하라며 바셀린 로션을 빌려준다. 빨래가 바람에 날려 막 섞였는데 나가봐야겠다고도 전해준다. 참 친절하다. 그러니까 지난번 만났던 이탈리아 아줌마는 프랑스 할머니가 체했을 때 내가 한국적 방식의 마사지로 낫게 했던 무용담을 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맛달레나의 친절함은 그녀 천성이기도 하면서 그 무용담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맛달레나도 크리스티안을 알고 있었는데. 레온에서 가방 잃어버린 이야기를 해줬더니 참 안 됐다고 한다. 그녀는 앞으로 그를 또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동네에는 식당이 없으니 저녁을 먹으려면 5시까지 예약을 하란다. 빨래를 하러 내려갔다가 큰 부엌과 식당을 보고는 이곳에서 제공되는 저녁이 전혀 수준 없을 것 같지는 않아서 예약을 한다. 환상적이었다. 샐러드, 가파초, 빠예야, 후식까지 진짜 맛있었다. 히토시 씨와 모레인이 '너도 같이 먹으러 갈래?' 했던 그 빠예야를 이곳에서 처음 먹었다. 이런 맛이구나. 우리나라 볶음밥처럼 생겼는데, 맛은 그렇지 않다. (무슨 맛이라고 이야길 하자니, 지금은 잊어버렸다. 그냥 참 맛있었다는 것만 확실하다.)
식탁에 모인 얼굴들이 다 처음 만난 얼굴들이라 낯설었으나, 포도주가 조금 들어가자 오픈 마인드가 되면서 유쾌한 내가 된다. 돌아가며 통성명을 했으나 다는 기억나지 않는다. 스페인 부부가 마주 보며 앉았고, 맛달레나, 오스피탈레로로 일한 적이 있는 스페인 여자, 미국인 애슐리, 애슐리의 친구인 캐나다 여성, 이름도 국적도 기억나지 않는 또 한 여자, 게오르그와 그의 여자 친구, 나, 오쵸 이렇게 10명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네 이름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가 사랑한 그 애슐리야?"
“그래, 그 애슐리야."
“네 이름은 절대 못 잊어버리겠다."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그냥 애슐리가 괜히 마음에 들었다.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결정적 장면들을 열 번도 넘게 읽었는데, 스칼렛 오하라가 레트 버틀리는 보지 못하고, "애슐리, 애슐리"하는데 정말 안타까웠었다.
애슐리는 모델의 포스를 풍기는 멋진 외모를 갖고 있는데, 거기다가 상냥하기까지 하다. 애슐리는 내가 제대로 이해를 못 하면 쉬운 영어로 어찌나 잘 풀어주는지, 동양계 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쳐본 듯한 솜씨다. 그러니 그녀가 예뻐 보일 수밖에. 그녀의 독사진을 찍었는데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실물은 정말 예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