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을 위한 건널목?

아스토르가((Astorga)식 환영

by 김동해

2012년 9월 11일 화요일

날씨 : 구름 많이 지나가서 걷기에 안성맞춤

걷기 : 비야르 데 마자리페(Villar de Mazarife)에서 아스토르가(Astorga)까지(? km)


마을을 빠져나오면 양 옆으로 넓은 농경지가 펼치진 도로를 따라 오랫동안 걷게 된다. 옥수수만큼 키가 크고 이파리도 비슷하게 생겼는데, 열매는 옥수수가 아닌 것을 보면 수수가 아닐까 싶다. 하늘로 향하는 줄기 끝은 약간 뽈또그레하게 열매가 익어가며 바람에 스륵스륵 흔들리는데 그 모양새가 참 예쁘다.

철길도 하나 지났다. 지나가는데 제어기도 없고, STOP 표지판만 녹슨 채 기우뚱 서 있다. 더 이상 기차가 지나가지 않는 듯한 고요한 철길이다. 그런데 그 한적함이 너무 예뻐 보인다. 일을 잃은 철길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틈새로 파고드는 스페인의 강렬한 햇볕과 노닥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점심 나절 다리가 예쁜 도시에 들어선다. 오르비고 강을 가로지르는 오르비고 다리(Puente de Orbigo)이다. 로마인들이 사용한 다리라고 한다. 물론 보수 공사를 많이 거쳐 지금은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내가 본 다리 중에 제일 길다. 다리의 아치가 무려 20여 개나 된다고 한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을까 싶다.

바(bar)나 레스토랑을 찾아본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왼쪽으로 바가 하나 보인다. 야외 테이블에서 히토시 씨가 식사를 하고 있다. 그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할 것 같아 그냥 못 본 척 지나쳐 다른 곳을 찾아볼 생각이다.

다리 위에서 한참 풍경을 구경하느라, 사진을 찍느라 지체를 한다. 막 떠나려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히토시 씨가 사진 한 장 찍어 달랜다. 각자 독사진도 찍고 그와 함께도 찍는다. 히토시 씨는 오늘도 선크림을 부옇게 발랐다. 오늘은 빨간색 티셔츠를 입어 힘차 보인다. 나는 이 동네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라 먼저 가라고 한다. 자기는 조금 전에 점심을 먹었는데, 그 레스토랑 맛이 괜찮더라며 추천해 준다. 얼마 멀지도 않지만, 순례길에서는 잘 돌아서 걷게 되지 않는다. 걸어가다 보면 앞에도 분명 바가 나올 테니 말이다.

다리를 건너자 호텔을 겸한 레스토랑이 하나 보인다. 음식 값이 비쌀 것은 조금 걱정이 되나, 맛은 있을 것 같아 들어간다. 프랑스인 아줌마 둘이 벌써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고 있다. 우리는 자주 길 위에서 봐왔지만 인사를 하는 사이는 아니라 불편하다. 그냥 나와 버린다. 그 이후로는 마을이 끝나가도록 쓸만한 바가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이 끝나갈 때쯤 앞서 걷고 있는 페이터를 만난다. 페이터는 곧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느 길이 더 예쁜지 물어본다.

"오른쪽."

대신 1시간 거리만큼 더 길단다.

"까짓것, 더 예쁜 길."

페이터도 예쁜 길을 선택한다. 갈림길에서 페이터의 선택은 항상 더 한적하고 예쁜 길이다. 거리는 그에게 별로 상관이 없는 듯하다. 나는 결국은 예쁜 길을 선택할 것이면서도 거리에 신경을 쓴다. 2시간 거리만큼 더 길다고 하면 더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가 예쁜 길을 선택한다. 나도 페이터처럼 간단하게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을을 하나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산길 이래 봤자 산 능선길 같은 곳이다. 나무도 거의 없고 농경지가 조성된 곳이라 산 느낌은 없으되 경사는 분명 느껴진다. 그늘은 없고, 앉아 쉴만한 곳도 없고, 똥은 마렵고, 길에 먼지는 풀풀 나고, 경사에 다리는 힘이 들어가서 발발 떨렸다. 더워서 땀이 삐질 나는 것이 아니라, 다리에 용을 써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런 힘듦이었다.

나 혼자 걷고 있나 싶도록 앞뒤로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는데 산길이 끝날 때쯤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스페인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너무 힘이 들어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내게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산길이 끝나고 평평한 고원지대를 걷는다. 저 앞에 이메타와 맛달레나가 전봇대 아래에 신발을 벗고 앉아 쉬고 있다. 맛달레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맛달레나, 미안해. 아까 나 때문에 길을 잘못 들었지?"

오전 나절에 맛달레나를 만났었다. 교회 건물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한참을 쉬고 있었는데, 맛달레나는 내게 쉬고 오라는 인사를 건네고 내 앞을 지나갔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 길이 아니라면서. 그러더니 획 꺾인 골목길로 들이갔다.

나는 내가 화살표의 진행방향에 앉아있는 줄 알았다. 순례자들이 여기까지 와서는 획 꺾인 골목길로 접어드는 것은 바에 들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길이 화살표 길이었던 것이다. 맛달레나는 내가 거기 앉아있어서 당연히 그 방향이라고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맛달레나가 아니었으면 잘못된 길로 들었다가 되돌아왔을 사람은 분명히 나였을 것이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네 탓이 아니야."

"얘, 이태리어 쓸 줄 알아?" 이것은 이베타가 맛달레나에게 하는 말이다.

"응. 씨(sea)는 이태리에서 지낸 적이 있어." 이것은 맛달레나의 대답이다. (나는 '동해'를 'sea'로 부르라 했다. 그래야 바다 'sea'로 그들의 머리에 잘 기억된다.)

이베타는 맛달레나의 친구인 내게도 사과 한쪽을 나눠준다.

우리의 목적지는 모두 아스토르가(Astorga)였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게 된다. 이베타는 누구와 실랑이 중인지 휴대폰을 끼고 산다. 오늘은 또 뭐가 잘 안 풀리는지 휴대폰에 대고 짜증을 내느라 우리보다 계속 한발 늦다.


오늘은 하늘에 은회색 구름이 많다. 구름은 높은 고원지대의 바람과 어울려 장엄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나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사진은 눈으로 봤던 장엄함을 전혀 담아내지 못했다. 나는 이래서 이미지를 믿지 않는다. 눈으로 봐야 한다.)

아스토르가 바로 전에 있는 산 후스또 데 라 베가(San Justode la Vega)라는 조그마한 마을로 접어들려면 언덕 경사길을 타고 쭉 내려오게 된다. 나는 발이 아파 언덕에서 좀 쉬기로 하고 이베타와 맛달레나를 앞서 보낸다. 언덕 벤치에 앉아 돌 십자가 뒤로 잔뜩 분위기 잡은 하늘을 보고 앉아 달달 떨리는 다리를 쉬게 한다.

내려오다 보니 앞서 갔던 맛달레나는 길 가 바에서 또르띠야를 칼질하고 있다. 또르띠야가 어찌나 두툼하고 먹음직스럽던지...... 물론 친절한 맛달레나는 와서 먹고 가라고 했다.


마을에 들어서기 위해 철길 건널목을 하나 건너게 되는데, 이 건널목이 보통 이채로운 것이 아니다. 아마 이 철길은 고속기차가 자주 다니다 보다. 철길 앞에 차단 장치가 있어서 기차가 지나갈 때는 차단 봉이 내려오는 식의 간단한 시설이 아니다. 이건 뭐 한 번만 폴짝 뛰면 건너질 거리를 이삼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경사로로 만들었는데, 경사를 최대한으로 줄이다 보니 이삼십 미터의 경사로가 무려 다섯 단이다 된다. 이 다섯 단은 한쪽이 그렇다는 것이다. 경사로가 양쪽에 다섯 개가 있으니 이삼백 미터를 걸어야 건널 수 있다. 이 건널목을 걸을 때쯤에는 지칠 대로 지쳐, 뭐 이딴 거대한 구조물을 힘들고 돈 들여 만들어설랑 사람을 애먹이나 싶었다. (이 구조물이 인간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기에는 너무 비실용적인 것 같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가축을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가 보니 소를 몰고 풀밭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던데, 가축의 이동을 위해 경사를 최대한 줄이다 보니 이런 구조물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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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달레나와 나는 너무 늦게 도착하여 알베르게가 꽉 차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아스토르가에 들어섰다. 광장에 들어서니 이미 도착한 순레자들이 광장 가로 들어찬 바에서 여유롭게 한잔들 즐기고 있다. 굉장한 미모의 애슐리와 그녀의 친구를 이곳에서 한 번 더 만난다. 히토시 씨는 남자처럼 생긴 또래 여성과 술을 마시고 있다.

숙소를 이디로 잡을까 망설이며 광장 가운데서 갈광질팡하고 있는데, 막 씻고 광장 구경을 나온 쥬느비에브를 만난다.

"쥬느비에브, 반갑다. 숙소는 잡았니?"

"쉿!" 하며 내 입을 막더니 내 몸을 돌려세운다. 바로 그때, 앞에 바라다 보이는 건물 꼭대기에서 남녀 인형이 움직이면서 종을 땡땡 친다. 쥬느비에브는 그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매 정시마다 종이 올린다고

한다.

"어머 멋지다! 쥬느비에브."

힘들고 불안한 마음으로 도착한 아스토르가에서 이런 식의 환영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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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느비에브는 사립 알베르게에 들었는데 아마 다 차지 않았을까 싶단다. 그녀가 알려주는 공립 알베르게는 내가 방금 지나온 곳이었다. 경연이 와있을 것이라고도 전해준다. 맛달레나는 너무 피곤하여 잘 쉬고 싶다며 사립 알베르게로 가고 나는 공립 알베르게에 든다.

씻고 빨래를 해다 넌 후에, 경연을 찾으러 알베르게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오늘은 그와 한국음식을 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식당에서 그를 발견한다. 챠오도 와 있다.

"장 봐다가 한국음식 해 먹읍시다."

자기는 지금 저녁을 먹고 있단다. 챠오와 우도가 하도 와서 앉으라고 해서 빈손으로 와 앉아 식사에 꼈단다. 우도는 극구 나 보고도 먹으라며 권한다. 준비했을 것은 2명분의 식사였을 것이고, 지금 3명이 먹고 있으니, 나는 그 음식에 손대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의 호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차만 한잔 얻어 마신다.

오래간만에 한국음식으로 배를 좀 채우나 싶었던 기대가 깨어지면서, 거기 껴서 저녁을 얻어먹고 있는 경연이 얄미워진다. "에이 참" 비슷한 소리를 했는데, 내 짜증이 더덕 묻은 것을 경연이 눈치채지 못했길......

있다가 술 한 잔 마시러 갈 건데 거기서 저녁 된 만한 걸 먹으면 안 되겠냐며 같이 가잔다. 난 지금 배가 고파서 저녁을 먹고도 저녁이 될 만한 술안주로 술을 마실 수 있을 지경인데, 경연은 내 허기의 수준을 알 턱이 없다. 경연은 이 길 위에서 별로 먹지 않고 지내는 것 같다. 그 자신도 한국에서보다 훨씬 적게 먹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철인 삼종경기에 참가할 생각이라는 사람이니 이 정도 걷기는 그에게 식은 죽 먹기여서 체력이 소진되지 않나 보다. 나는 한국에서 보다 배는 많이 먹고 있다. 그러고도 늘 허기져 있다. 혼자 먹는 것도 싫어서 그냥 그러나 한다.


마땅한 술집을 찾느라 왔다 갔다 하며 얼추 도시 구경을 하게 된다. 경연이 저기 저것이 가우디 건축물이라고 알려준다. 가우디가 직접 설계한 가우디 박물관이라는데, 그 느낌이 레온에서 보았던 까사 보띠네스와 비슷하다. 파란 지붕에 레고를 끼워 맞춘 것처럼 느껴지도록 쌓아 올려진 하얀 벽돌의 벽. 가우디 건축물을 경연이 또 알려주는구나.

도중에 히토시 씨를 만나 같이 가자고 한다. 그도 아직 저녁식사 전이란다.

"나도 아직 저녁 안 먹었어. 저녁 겸해서 마시면 되지 않겠니. 같이 가자."

히토시 씨가 광장에 면해 있는 바들은 비싸니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잔다. 히토시 씨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는 영어는 안 되지만 여행을 많이 다녀서 물정은 잘 안다.

어느 골목 바에서 이미 술 한 잔 기울이고 있는 상현과 마이를 발견한다. 상현은 한국인 언니인 나에게 전혀 살갑지 않다. 우리가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그런가? 같은 국적의 큰언니보다는 국적은 달라도 같은 또래의 마이가 편한가 보다.

히토시 씨는 크림스파게티를 시키고 나는 브라바스를 시킨다. 그는 항상 자기 음식을 맛보라고 한다.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예의로서 상대에서 음식을 권해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권하는 것이다. 크림스파게티야 흔하지만 스페인의 이 바에서 이 시간에 맥주와 먹는 스파게티는 이 순간이 유일할 것이므로. 나는 그의 마음이 그렇다고 해석하여 사양 않고 포크를 가져간다.

"히토시, 너무 맛있다."

"더 먹어." 한다. 히토시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나는 더 먹었다.


이제 산티아고가 가깝다. 다들 9월 22일쯤에 산티아고에 도착될 것 같단다. 그럼, 그날 다들 도착하는 것으로 하고 만나 빅파티(big party)를 하자고 약속한다. 수첩에 메모해 둔다. 챠오는 그날 도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중국인이라 왠지 약속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챠오는 알코올이 약간 들어가서 그런지 말이 많다. 챠오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막 섞어가며 말한다. 나는 알아듣겠는데 경연은 챠오가 하는 말을 제일 못 알아듣겠단다. 경연은 저런 걸 어떻게 알아듣느냔다.

"스페인어랑 이태리어랑 비슷하거든요."


아스토르가의 세르바스 데 마리아(Servas de Maria) 알베르게 앞에는 무거운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쳐 메고는, 레인코트를 바람에 펄럭이며, 긴 지팡이를 들고 길 떠나는 청동상이 있다. 바닥에 적힌 것이 작품 제목이라면, 이렇게 적혀 있다.

'꿔 바디스?(Quo vadis?,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인생에 관한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면, 내 답은 '나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면서 가는 삶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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