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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Jan 23. 2021

교촌에 가서 고추바사삭을 내놓으라고 했다

가게문을 들어서자마자 종업원과 빠르게 아이컨택을 하고 자신 있게 외쳤다.

'고추 바사삭 한 마리, 아까 전화로 주문한 거요.' '예?', '아까 전화로 주문한 거 찾으러 왔어요.' 역시 의아한 반응. 이건 뭐지? 내 주문을 누락시켰구만, 그러니까 저렇게들 놀라지. 아, 이거 어쩌지. 지금 주문 들어가면 늦어지는데. 뭐라고 컴플레인을 해야 하나? 생각들이 스치고 있는데, 종업원의 한 마디가 분위기를 역전시켰다. '그거 저희 아닌데요. 그건 굽네인데요' 

아차. 나는 왜 손수 핸드폰에서 굽네를 찾아 전화주문을 해 놓고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제 발로 걸어서 교촌으로 갔을까? 누가 헷갈리게 말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내 발로 한 것이니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의심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제서야 내가 너무 자신 있게 문을 열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던 순간이 후회가 되었지만, 어쩌겠나.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고, 망신당한 김에 궁금한 거나 물어보자 싶었다. '아, 근데 굽네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 근처는 아닌 것 같은데' 경쟁가게를 대놓고 물어보다니. '알겠습니다'하고는 조금 전과 상반되게 기가 푹 죽은 모습으로 돌아서는데, 패기 있는 종업원의 말이 내 뒤통수를 때린다. '다음에는 저희 교촌도 이용해 주십시오.'


문 밖을 나와서야 실소가 터졌다.

생각해 보니 굽네는 한 번도 찾아가 본 적이 없어서, 지도검색을 하고 정 반대로 길을 걸어가서 오래전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고추 바사삭'을 무사히 찾아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타박하는 딸에게 나의 무식한 무용담을 늘어놓고는 한바탕 웃고 치킨을 먹기 시작했다. 딸은 '정말 동네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다'며 앞으로 교촌을 어떻게 가냐고 벌써부터 걱정이다. 내가 마스크까지 꼈으니 나를 못 알아볼 거라고 말했지만, 한참 예민한 나이인 딸은 아예 나하고는 문 밖을 같이 안 나갈 작정을 마친 듯하다. 


덕분에 저녁내내 혼자 웃다가, 딸이랑 같이 웃다가 했다.

심심하거나 공부가 하기가 싫으면 내 방으로 마실을 오는 딸은, 또 와서는 '아까 종업원은 몇 명이었느냐?', '다 같이 들은 거냐?' '웃지는 않았느냐' 아까의 치킨원정대 상황을 생방송 수준으로 중계를 부탁했다. 그리고는 가뜩이나 아직도 민망한 엄마에게 뼈를 때리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아마, 아까 거기 있던 직원들이 다 엄마 말 듣고, 엄마 돌아간 다음에도 한참은 웃었을걸? 아직도 그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몰라' 뭐, 그러던가. 덕분에 최소 3명,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저녁 내내 웃었으면 되었지. 요즘처럼 웃을 일 없는 시절에, 뭔가 중요하고 뜻깊은 일을 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아마 너무 쪽팔린 나머지 자기 최면이 강하게 드는지도 모르겠다).


저녁의 소소한 에피소드 덕에, 치킨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왔고 나는 계획하지 않은 걷기를 예상보다 많이 하게 되었다.


사는 데에는, 예기치 않은 것들 때문에 슬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것 같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찾아온 절망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고, 더 좌절하지만

역시 생각지도 못했던 치킨 주문 해프닝으로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내 인생에 숨어있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슬프고 기쁜 일들. 두렵기도 하고 기대도 된다. 

이렇게 맞이하면 되겠지. 갑자기 찾아온 손님처럼. 

불청객이라면 그 역시 맞이하고 어느 순간 또 떠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손님이 어느 밤의 즐거움이라면 불쑥 튀어나와주어서 반갑고 고맙다고, 나중에라도 또 꺼내어서 웃어보아도 되겠냐고 말해준다면 말이다.


오늘의 교훈.

꺼진 주문도 다시 보자.

굽네 가는 손님 막지 않지만, 다음에는 교촌을 이용해 달라고 했던 점원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미안해서라도 다음에는 허니 콤보를 먹어야겠다. 하아. 다음 주문에는 굽네로 가면 안될 텐데. 

뇌와 입과 다리가 각각 상당히 독립적인 내 신체를 탓하면서, 남들은 뇌 건강에 좋으라고 화투를 한다는데 나는 오늘부터 브랜드 별로 치킨메뉴를 외워야겠다. 치킨바사삭은 굽네. 교촌은 허니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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