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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Mar 05. 2021

놓여진대로 살고 있었다.

요즘 통 글을 쓰지 못했다.

브런치도 거의 들어오지를 않았는데, 오늘 들어와서 마지막 글 쓴 날자를 보니 정확히 한 달 전이다.

글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글을 쓸 동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글에는 나 자신이 반드시 투영되기 마련인데, 요즘의 내 모습이 글로 드러나는 것이 썩 반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멍한 채로, 활기 없는 채로 지나 보내던 시간이었다.


어제저녁에 문득 '요즘의 나' 같은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

거실장에 오래전부터 내 눈에 거슬리던 물건이 있었다. 5년은 훌쩍 넘는 시기에, 내가 열광해서 열심히 사 모으고 조립해서 올려놓았던 미니블록들이었다. 캐릭터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헬리콥터도 있고  작은 조각들을 조립해서 나름 전시해 놓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벌써 몇 년이 지나면서 조각 몇 개씩은 없어져서 서 있는 것도 기우뚱해지고, 장식 기능은 하지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몇 년째 그냥 그 자리에 계속 있던 물건이었는데, 어제 갑자기 저걸 치워보겠다는 마음이 동해서 싹 다 집어서 버려버렸다.

그 작은 몸체에도 먼지는 몇년동안 공평하게 쌓여있었다. 손이 꽤 더러워질 정도로 끈적하게 덮여있던 먼지를 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같다.'


나도 저렇게 놓여진 대로 살고 있었구나.

언제부터인가 내게도 내 존재가 새롭지 않고, 그냥 거기 있는 채로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시작은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으나 거기 그렇게 놓여져 있었으니까. 왜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생각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냥 있었으니까 그냥 지내는 것.

맨 처음 만들어진 목적과 쓰임새가 있었을 텐데, 어느 한 자리에 놓이고 난 이후부터는, 원래 움직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냥 땅에 붙어있는 채로 살았던 것 같다. 정지라는 관성의 힘이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그 힘을 깨뜨릴만한 외력도 내력도 없어 보인다.


아마도 지금까지 내가 움직일 수 있었던 까닭은 적당한 때에 적당한 외력이 있어서였나 보다. 늘 어딘가에 속해있었고, 그 일원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느라 움직였는데, 지금 외력이 없어진 상황에서 내력도 작동하지 않는다. 내가 자리를 옮겨야 비로소 위치를 바꿀 수 있었던 블록처럼, 나도 누군가가 움직여 준 채로 놓여있다가 그 힘이 멈춘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쪽이 옳은 방향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붙박여 있다.


어떻게 해야 나는 버려진 블록과 달라질 수 있을까? 블록과 다른 미래를 가질 수 있을까?


블록을 치웠는데 내 마음이 움직여진 것 같았다.

블록의 어수선한 잔해들, 떨어진 팔, 기우뚱한 비행기 날개들을 싹 버리고 나니, 거실이 좀 더 환해졌다. 물건이 정리가 되니, 내 마음도 조금 정리가 되는 듯했다.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다. 예전부터 나 밖에 있는 사물이 정리가 되면 나도 좀 더 편해진다.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성립한다. 내 마음이 어지러우면 벌써 책상부터 난리가 아니게 된다.


웬만히 지저분한 집이 내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당히 지저분해야 면역력이 강화된다는 생각으로 청소와 정리정돈은 언제나 맨 마지막 극한치에 도달했을 때에만 하는 일이었다.

이제 좀 내 밖의 사물들을 움직여 볼까 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내 안에 숨어있던 내력에 발동이 걸리는 것 같다. 아마도 밖의 사물의 운동 에너지가 내 안의 에너지로 바뀌어서 들어오는 것 같다. 학교 때 배웠던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는 맞는 듯, 틀리는 듯 하지만 말이다.


물건이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하다면, 나도 왜 여기에 있는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거실과 내 방에 흩어져 있는 책들을 정리하려고 한다.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고, 무엇에 목말라하는지, 나는 지금 어떤 글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몇 년째 거기에 있었지만, 사실은 소용없는 물건들을 버리려고 한다. 잉크가 다된 초록색 사인펜도 오늘 하나 버렸다. 이제 소용없는데 끝끝내 붙들고 있는 내 마음의 초록색 사인펜은 무엇이 있을까?


놓여진 대로만 살지 않기

걸어온 길의 반대방향을 살펴보기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고, 내게 중요한 것을 내 눈 앞에 놓기


어수선한 집구석을 조금이라도 털어내고 나서, 버려낸 먼지만큼 이런 것들도 얻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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