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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Jan 13. 2021

설상가상우상뇌상

내가 지어낸 말이다.

'설상가상'만으로는 그때의 상황을 표현하기에 뭔가 부족해서이다. 눈 위에 서리가 오고 그위에 비도 오고 천둥도 치고 이 정도는 되어주어야 그날의 총체적 난국을 설명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기상상황이 한꺼번에 벌어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 날 내게는 그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추운 겨울 저녁 처음 가는 장소를 찾아 나서는 길이었다.

지하철까지야 쉬웠지만 출구에서 나와서 큰 사거리 두 개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 지도앱은 지하철역에서 마을버스를 타라고 했지만, 버스를 타나 걸으나 시간이 비슷하게 걸리기도 하고 건강을 위해 걷자고 대견하게 길을 나선 것이 고난의 시작이었을까?


날씨가 추우니 당연히 두꺼운 코트를 입었고 가뜩이나 둔한 옷차림에 양쪽 어깨에 맨 노트북 가방과 배낭은 교대로 흘러내렸다.

핸드폰을 보면서 길을 찾아가야 되는데 마스크 때문에 앞이 계속 뿌옇다.

길거리에 잠시 서서 안경을 닦고 다시 꼈는데도 잘 안 보인다. 아, 나 노안이지. 핸드폰 작은 글씨 더군다나 지도 같은 건 안경을 벗어야 보인다.

대충 다음 사거리까지 길을 확인하고 길을 나서는데 또 가방을 추켜올리랴 칼바람에 옷을 여미랴 정신이 없다.

여기서 어디로 가라고 했더라? 금방 본 길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놈의 정신머리. 그래도 아침에 스마트장갑을 끼고 나온 센스를 칭찬한다. 이 추운데 장갑 안 벗어도 돼.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려다가 멈칫한다. 아, 나 지문인식이지. 결국은 또 멈춰서 장갑을 벗어 한 손에 쥐고 손가락을 대어 본다.

'일치하지 않습니다.' 제 자리에 안 대어서 그러나? 정확하게 대도 같은 메시지만 반복한다. '일치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 리조또 만들면서 가스레인지 옆에 둔 그릇을 무심코 집었다가 오른쪽 엄지손가락 허물이 벗겨졌었다.  그 뒤로는 지문인식이 잘 안 되는 걸 또 깜빡했다. 스마트폰이 스마트하긴 한 거냐며 주인도 못 알아본다고 알아듣지도 못할 상대에게 투덜거려 보았다.

흘러내리는 가방, 뿌연 안경, 그 사이 꺼진 핸드폰 화면, 한 번 더 깜빡한 경로, 장갑 벗고 비밀번호로 잠금을 풀고. 여기까지 한 세트를 반복하고서야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우여곡절에 비하면 무슨 나쁜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집을 잘 찾아갔고, 길도 헤매지 않았다. 다만, 가는 길 위 여러 상황들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거꾸로 상황을 뒤집어 보면, 어느 햇살 좋은 오후, 핸드폰 없이도 잘 아는 길을, 아무런 짐도 없이 걸어가면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일까? 그게 딱 동네 산책인데 말이다. 나는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지금이 추운 겨울 저녁이 아니야, 와 너무 좋아','여기 다 내가 아는 길이야 핸드폰 안 켜도 좋아. 와 너무 좋아' '게다가 짐도 아무것도 없어, 더 이상 좋을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하나?


우리는 불운한 경우는 불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불행이 없는 상황을 기꺼이 감사해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쩌면 불행이 내게 닥치지 않은 상황을 디폴트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서 저녁에 무사히 들어가는 것, 아침에 헤어졌던 가족들을 모두 저녁에 만나는 것, 배 지 않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 모두 당연하지 않고 지극히 감사하다고 여겨야 하는 것들을, 부재가 있기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아둔함 같다.


코로나로 우리는 많은 당연한 것들을 빼앗기고 그리워하며, 그것들을 누릴 수 있을 때 감사해한다. 이른 새벽 인적이 없는 길에서 마스크를 벗고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를 그대로 들이마실 때, '그래, 겨울 공기가 이런 맛이었지' 새삼스럽다. 하지만 역시 아둔한 인간은 코로나로 빼앗긴 것들의 부재만 생각할 뿐, 여전히 우리를 지키고 있는 일상적인 것들에는 감사해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오늘 생각해 본다. 


한 시간 반 걸린 귀가시간도 감사하다. 저번 주 수요일의 4시간 반에 비하면 이건 뭐 거의 순간이동 수준이다.

하루에 한 가지씩, 당연하지 않게 생각해 보기. 벌써 1월 중순인데 예상치 못했던 새해 다짐들이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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