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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Nov 12. 2020

멈추고 비워야, 나아가고 채울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더니, 그래도 할 일이 있다고 한다

이전 글 살면서 쓰러질 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써놓고서는 갑자기 겁이 났다. '그러다가 저 사람이 잘못되면 책임질 거냐'라고 누군가가 따질 것 같았다. '너는 지금 괜찮다고 그렇게 무책임할 거냐?' 물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조금은 비겁한 마음으로 '나는 어땠나, 나는 어떻게 일어서고 있나?' 생각하면서 글을 급하게 쓰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건 해보자고.


나를 자세하게 보기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 보니 문득문득 내가 왜 힘든지가 생각이 났다. 삶에 빈자리가 생기니까 내게 지금 필요한 생각들이 몰려와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았다. 빨래를 개다가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엄마라고 모든 가족을 돌보기만 한 거야. 나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고 나조차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지. 나도 누가 돌봐줬으면 좋겠어. 내가 그런 것처럼'

참 이상한 게 남들에게 쉽게 들었음직한 말이고 특별히 거창하지도 않은데, 나 스스로가 이런 생각을 하큰 깨달음으로 와 닿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위로가 된다. '아, 내가 그런 거였구나'를 스스로가 깨닫는 과정이 많은 안도를 준다. 같은 말이어도, 맞는 말이어도 남이 나를 진단 내려주는 건 효과가 없는 것 같다.

나를 돌아보려면 빨리 일어나야 한다는 재촉에서 벗어나야 하고, 서두르며 걸어가던 것을 멈춰야 한다. 멈추고 비워야, 나아가고 채울 수 있다.


나를 토닥거려주기

'너였으니까 이 정도 한 거다. 이 이상을 못해냈다고 자신을 나무랄 필요 없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엄두도 못 냈을 거야'라고 자신에게 이야기 해주자.

주위에 '더 할 수 있다. 당장 일어나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당분간 피하는 게 좋겠다. 내가 일어나지 못하는 게 내 탓이 아니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도 내 탓이 아니다. 누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싶어서,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무리 마음을 고쳐 먹으려 해도 안 되는 때가 있는 거다.

'Be positive'는 명령문으로 사용할 수 없다. 문법적으로는 맞는 말이나, 지금 힘든 사람에게는 사용할 수 없다.  


'힘들다'말하기

가족들에게 '나 힘들다'라고 말했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 나는 여기서 버티는 걸 그만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일도 내가 쉬면 큰일 날 것 같았는데 일단 접었고, 집안 일도 안 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가족들이 나를 많이 걱정해 주었고 무엇보다 나를 그냥 내버려 둔 게 가장 좋았다. 내가 맘껏 하루 종일 무기력할 수 있게 해 줬다. 아마 나를 배려해서라기보다는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였을 듯하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나는 '종일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기'라는 일을 열심히 하다가 일어날 수 있었다.

주위 친구들에게도 내가 힘든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래서 내가 지금 일어서지 못한다고.

그래도 위로가 충분하지는 않았다. 나는 열심히 주기만 하고 하나도 받지 못해 많이 억울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하느님께 징징거렸다. 왜 나만 힘드냐고, 왜 나만 이렇게 손해 보는거냐고 하소연했다. 하느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속으로 '하느님도 결국은 나를 모른 척하는 거야?'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쯤 하느님이 위로를 건네셨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연락이 뜸했던 친구가 걸어온 전화를 통해, 아들의 뜬금없는 고백을 통해, 새벽의 울음 뒤에 찾아오는 이유 모를 평안함을 통해 나를 위로하셨다.

'애썼다. 네가 많이 힘들었다. 이제 좀 쉬렴. 너를 위해 또 다른 길을 내가 준비했다' 내 귀에 들리는 하느님의 선명한 목소리는 없었지만, 내 마음이 무언가에 진동이 울려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말하고 싶다.

아들 때문에 정신을 고 넘어졌을 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2년 동안 상담을 받았다. 아들과 말 한마디 건네기 힘들었을 때, 숙제 검사 맡는 학생처럼 선생님께 물어보고 가르쳐 준 대로 집에 와서 해 보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때의 상담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자존감이 있는 대로 짓밟힌 채로 어느 구석에 처박힌 채로 발견되었을 거다.

우리는 너무 힘들면, 도와달라고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도 그럴 의지와 손을 뻗을 힘이 있을 때 이야기다. 주위를 둘러보는 온기 있는 시선이, 사소한 눈빛을 알아차리고 손을 건네는 것이 때로는 아주 큰 힘이 될 수 있다.

그가 힘든 걸 이해해 주는 것, 나도 그랬을 거야 알아주는 것. 글로 쓰니 간단하지만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재촉하지 말자.

아래의 책 내용은 사회가 도덕적인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자 하는 불안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불안한 나의 모습, 옆사람의 고통을 대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저항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힘들었던 만큼 침묵도 길어야 한다. 성찰도 충분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 시간이 어느 정도면 충분할지에 대해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우리는 손쉬운 해답, 우리의 불안을 빨리 덜어주는 해답을 원한다. (중략) 우리는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곧장 해답을 얻기를, 그것도 매우 빨리 얻기를 바란다. 활동적이고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자 하는 이 사회는 긴 호흡의 성찰, 숙고를 거부하며 이러한 시도에 저항한다.('그리스도교를 다시 묻다', 더글라스 존 홀 지음, 출판사 비아, 182쪽 인용)


Homeless Jejus라는 동상이다.

티모시 슈말츠라는 작가가 만든 작품인데, 캐나다에도 있고 서울 서소문 공원에도 있나 보다. 마음이 먹먹해진다. 넘어진 이들보다 더 낮아진 예수,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있는 예수. 내가 너를 위로하고 있다고. 나처럼 너희들도 서로 위로하라고. 그렇게 저 벤치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를 정말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처럼 되기 전까지는 감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듯하다. 그래서, 섣부르고 빠른 판단으로 뱉는 말보다 이렇게 직접 보여주는 모습이 마음에 더 와 닿는다.

누워있는 예수님 옆 빈자리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 같다.  같이 앉아 있으라고(사진출처: 동아 포토)


예수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냥 내가 보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서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자칫 내 말로 그들이 상처 받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 말이 그들을 더 비참하게 만든다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다시 삼키게 해 주십시오.
쓰러질 만큼 힘들었겠다고. 다시 일어서려고 해 봤지만 팔꿈치를 땅에 기댈 힘도 없다는 걸 알겠다고. 좀 누워있어도 된다고. 그들에게 말해도 되겠습니까?
그들을 당신이 일으켜 주십시오. 우리의 위로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낮게 더 낮게 누워있는 당신이 그들을 위로해 주시면, 그들이 어느 사이엔가 힘을 얻겠습니다. 혼자 쓰러져 있지 않음을, 당신이 같이 있음을, 그들이 일어나도 당신은 다른 쓰러진 사람들 사이로 또 넘어지려고 향할 것임을. 우리가 압니다.
당신을 내가 위로하게 해 주십시오. 많이 아팠겠다고, 당신의 발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아픔을 감히 조금은 알겠다고, 그렇게 조금 아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위로하면 되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서로 안아주다 보면, 당신이 저 벤치에서 앉아 일어나겠는지 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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