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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Nov 11. 2020

여자 친구, 여자 연예인의 몸무게

신곡을 낸 여자 친구 뮤직 비디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노래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다들 너무 말랐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심각한 저체중 수준이다. 화면으로 보는 게 실물보다 좀 더 크게 나온다는데, 그걸 감안하면 도대체 실제로는 얼마나 말랐다는 건지? 우리나라 연예인들 체중에 대한 기준치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 저렇게까지 말라야 하는 건지? 아마 그들의 엄마와 내가 비슷한 연배일 수 있어서 그런지 정말로 걱정이 많이 되었다. 내 눈에는 도저히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는 체형이었다.


십 대인 딸이 가끔 물어본다. '엄마, 나 살쪘어?'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아니, 하나도 안 뚱뚱해. 다이어트하면 혼난다. 어디 뺄 데가 있다고. 엄마가 딱 예쁘게 낳아줬구만' '뭐가 예뻐. 다리는 짧고 허벅지 굵은 것만 줬으면서, 다른 거 좋은 것 좀 주지'

'다리가 너무 뚱뚱한 거 아니야?',  '아니 그럼, 그 정도도 다리에 살이 없으면 몸을 어떻게 지탱하니?'


그들은 제대로 몸을 지탱할 수도 없어 보이는데 격렬한 춤까지 춘다. 여자 연예인이 젊은 여성들에게 미치는 신체상을 생각하면, 더욱더 걱정이 된다.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빼지 않아도 될 살을 빼느라 애를 쓸까? 단순히 '살을 빼야지'하는 걱정에 그치는 게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 방법을 택하면서 무리하고 있지는 않는지. 나는 무분별하게 말라야 한다는 강박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생각한다.


매스컴의 잘못인지, 대중의 잘못인지?

연예인들, 특히 여자 아이돌은 말라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기준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 매스컴이 먼저인지 대중들의 시선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에 올라오는 연예기사들이 한몫을 한다는 점은 피할 수 없겠다. '부러질 것 같은 다리', '극세사 다리', '한 줌 허리' 기사 제목만을 보고 판단한다면, 그들은 지금 무대에 오르기 전에 몸을 먼저 보살펴야 할 것 같다. 유독 여자 연예인들에게만 외모로, 몸매로 혹독하게 평가하는 대중들의 시선은 왜일까? 보이는 외면에 민감한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집단적 시선에도 원인이 있겠다 싶다.

대중이라고 쓰고 나는 제삼자 인양 회피하려는 건 아닐까? 나도 대중의 한 명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특히 나를 포함한 여자들의 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유난히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나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번 상담 때 심리검사에서, 내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 쓰느라, 늘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그런데 그 시선은 언제부터 왜 여자들은 절대로 뚱뚱하면 안 된다고, 말라야 한다고 우리들을 압박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 시선 밖에 서 있을 자유를 선택할 수 없을까?

물론 건강해야 한다. 과체중이 건강을 위협하는 문제는 맞으나, 왜 다른 한 편의 저체중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부추기기까지 하는지? 우리 사회가 너무 경직되어 있다는 걸 느낀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경계를 긋고, 그 경계 밖을 나쁜 것으로 여김으로써 안 쪽에 서 있는 나를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어 한다. 그 경계 밖으로 몰아낸 나아닌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젠더, 체형, 몸무게, 사회적 위치 등으로 '나'와 '너'를 자꾸 구분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닌지?

 

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통해서 자신을 인정하는 사회면 좀 더 융통성 있지 않을까?

 문득 우리가 많이 불안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성적으로 자신을 평가받고, 커서는 사회 안에서 이루어내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있는 그대로 '너는 너여서 예쁘다.' '너여서 좋다.'라고 들으며 아이들이 커간다면, 남의 시선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가 인정해주고, 나 스스로가 나를 인정해주는 사회에서는 남과 나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경계가 좀 더 희미하지 않을까?  


타인의 구분에 나는 좀 더 당당할 수 있을까?

먼저는 우리들의 시선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본다. 시선 자체가 따가운데, '그걸 왜 부드럽게 받아들이지 못해?'라고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 하지만, 사회 자체가 건강해지면 남들의 시선에 개인들도 좀 더 당당하게 되받아 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때에 태어났어야 한다. 내가 그녀들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과하게. (보티첼리: 봄)

미의 기준도 시대마다 다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우리의 시선으로 봤을 때 통통한 여인이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여기에서 미의 기준도 결국은 그 시대, 그 공간이 정한 사회적 기준이다. 그 사회가 정했다고는 하나, 그 사회 안이라고 해서 모두 같았다는 뜻은 아닐 거다.

주류에서 벗어나 설 수 있는 용기를 개인에게만 강요할 수는 없다. 나의 모든 생각, 모든 상황을 다수에게만 맞출 수는 없으므로, 그래서도 안 되므로, 소수의 자리에서 서 있는 용기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다수결의 원칙이 언제나 옳지만은 않다.

다수가 행하는 폭력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의견을 낸 소수, 또는 말하지는 못하나 속으로 '이건 아닌데'라고 말하는 침묵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있다. 건강한 사회란, 소수가 무시되지 않고 그들에게 열려 있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될수록, 다수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무조건 다수에 속해야지만 불안하지 않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내가 다수에 포함되어야만 마음이 놓인다면, 내가 은연중에 '너'라고 규정짓는 소수는 어디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내가 '다수'라면 '소수'는 내가 던지는 폭력에 상처 받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소수'인가? 그렇다면 얼마나 두렵고 '다수'로 들어가기 위해 나 자신을 부정하는가?

쉬운 문제는 아니다. 사회가 바뀌어야 하고, 그 속의 개인도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 드는 생각은 우리 사회가 99:1로 만들어지지 않고, 여러 숫자, 색, 성격의 조합으로 갈수록 건강해지리라는 생각이다. 11:13:25:1:14:16:20:10의 사회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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