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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Dec 12. 2020

'걷는'은 되고, '예쁘는'은 안 되는 이유

오십 평생 처음 알았다.

띄어 쓰기 강의를 듣고 있다.

맞춤법을 매번 틀리는 게 자존심이 상하던 차에, 대부분 틀리는 부분이 띄어 쓰기라 배워두면 낫겠지 싶어서 등록했는데, 기대 이상이다. 활용도도 높고 무엇보다 아주 재미있다. 고등학교 때도 수학이 좋아서 이과를 선택했고, 대학원 때도 통계가 유난히 좋았던 천생 이과생이었는데, 뜻하지 않은 지점에서 국어인 띄어 쓰기와 수학이 갖고 있는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혼자 좋아라 하고 있다.


단어 하나를 어간과 그에 붙는 어미로 나누는 과정은 인수분해와 비슷하다. '주시었던'이란 말은, 주(어간)+시(높임 선어말 어미)+었(시제 선어말 어미)+더(회상 선어말 어미)+ㄴ(어말어미)로 분해가 된다.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수로 분해하는 인수분해와 같은 원리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법'이 언어의 규칙에 대해서 정리를 한 것이니, 역시 규칙인 수학과 닮을 수 밖에는 없겠다는 당연한데도 지금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면에 대해서 '아하'깨닫게 된다.


우리에게는 한국어가 모국어이니 문법을 생각하면서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외국인에게는 참 이해하기 힘든 언어가 한국어이겠구나 새삼 생각이 들었다. 조사나 어미 하나 다르게 쓰면 말로 설명하기는 힘드나 우리는 즉시 이해할 수 있는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

'가다'라는 동사 하나도 '간다, 가는구나, 가냐, 가라, 가고, 가니, 가게, 간' 등등. 미처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활용이 있다. '세차를 할라치면 비가 꼭 오더라' 이런 말도, '할라치면'의 뉘앙스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번역가가 만나는 고충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우리나라말이 참 맛깔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써놓고 보니, '맛깔지다'도 우리끼리야 척하면 아는 뜻이지만 영어로 tasty 이렇게 번역된다고 생각하니, 짜지 않는 소금을 먹는 듯한 표현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말에 이렇게나 많은 표현이 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동사와 형용사를 배우면서 알게 된 당연한 듯 새로운 한 가지.

동사는 '동작이나 과정'의 의미가 담겨 있고, '형용사'는 '성질이나 상태'의 의미가 담겨있다. 이 단어가 동사인지 형용사인지는, 관형사형 어미 중 현재를 나타내는 어미인 '-는-'을 동사에는 쓸 수 있고, 형용사에는 쓸 수 없다는 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걷다'는 '걷는 사람'이라고 쓰지만, '예쁘다'는 '예쁘는 사람'이라고 쓰지 않는다.  이건 동사니까 '는'을 붙여야지, 형용사니까 못 붙이겠네.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하면서 말한 적이 없는데, 이게 문법이라고 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평생 의문 한 번 들지 않고 쓰던 표현이 낯설어지면서 '왜?'라는 질문이 갑자기 생겼다


'어떻게 그런 현상이 만들어졌을까?' 질문을 했더니, 선생님 대답은 '언어에는 뿌리가 없다'이다. 되게 멋있는 말 같았지만 결국은 '모른다'는 뜻이었다. 반면에 '소리'를 공부하면 거기에는 진화학적인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발음하기 편한 대로 소리가 발전된다고.

괜한 오기가 발동했다. '내가 한 번 뒤져보겠어'라고. 발음 때문일까? 생각해 보았다. '은연중에 동사와 형용사를 구분해서 모음을 특정 지어 단어를 만들고 그 발음 때문에 이런 룰이 생기는 게 아닐까?' 땡. 틀렸습니다. '가르다'는 동사인데 '가르는'이 되고, '예쁘다'도 '으'모음인데 '예쁘는'은 계속해서 성립되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이런 규칙이 있는 언어가 우리나라밖에는 없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다른 나라 말을 다 모르긴 하지만 우리나라 말에는 받침이 있어서 이런 변화가 가능하지 않나 싶었다. 


이 강의에서 가장 좋은 점은 '낯설게 보기'이다.

그동안 아무 의심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말하던 우리나라 말 문법을 이런 식으로 들여다본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던 것을 갑자기 낯설게 바라보게 된 새로움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을 어느 날 갑자기 다른 길로 접어든다던지, 오른쪽으로 사용하던 마우스를 왼쪽으로 바꾼다던지, 십 년째 같은 자리에 있던 가구를 옮겨본다던지 하는 일이다. '예쁘는'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그걸 알아낸다고 해서 아무런 이득도 없으면서 열심히 머리를 짜내는 동안 내가 즐거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쁜'이 당연하지 않고 신기해 보이고 말이다.


나 자신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럴 수 있다면 훨씬 많이 즐겁고 행복할 텐데 말이다. 당연히 단어 하나 낯설게 보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과정은 나에게 딱 붙어 있어서, 떼어내기 힘들고 거기에 의문을 제기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나=감정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나=화남'이라고 여기지 말고,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마치 내 자신을 남 보듯이 그렇게 따로 떼어놓고 바라보는 훈련을 해 보라는 것이다. 이것 역시 재미있는 과정이다.


나는 혼잣말을 많이 한다. 그 혼잣말에는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많다. '내가 지금 왜 화났지?', '나는 지금 왜 마음이 편하지가 않을까?'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왜 불편한지도 모른 채, 한동안 마음을 무겁게 들고 다니는 적도 많다. '아, 해야 할 일을 계속 미루고 있어서 그것 때문이었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그 정체를 알게 되면 상황이 분명해지고 아직 일은 하지 않았지만 덜 불안해진다. 왜냐하면 그 일만 하면 없어질 한시적인 불안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외에,  글쓰기도 나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는 좋은 방법이다. 나를 타인처럼 바라보고 글을 쓰다 보면, 그 당시에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을 일으킨 원인,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상황이 절망적이지도 대단하지도 않았다는 제3자의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

평생을 붙어 있어서 어느 때는 존재도 잊고 사는 '나 자신'을 낯설게 보는 방식이 역설적으로 '나 자신'을 보다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신비롭고 마음이 깊어지는 느낌이다. '나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이.


당연한 것은 없다.

익숙해서 그렇지, 처음부터 당연한 것은 없다.

이사 와서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을 처음으로 걸어왔던 날이 있었을 거다. 육교를 건널까, 신호등으로 건널까, 이리도 가보고 저리도 가보다가 어느 날부터 지금의 길로 매일 걸었을 텐데, 다른 길은 어떤 풍경이며 어떤 느낌이었는지 새삼 궁금하다.

마우스를 왼쪽으로 바꿔서 쓰다 보면, 중요한 기능들은 오른쪽에 몰려있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그래서, 단지 마우스를 쥐는 손만 바꾸었을 뿐인데, 글을 저장하고 기능을 사용할 때마다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단편적이지만 소수에 위치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공평함,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당연하지 않다. 매일 보고 매일 부딪히며 살아가느라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집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감사하고 따뜻한 존재들이다.

내 주위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너무나도 익숙했다면, 한 번 머릿속으로 그 자리를 비워볼까? 얼마나 그 자리가 무겁고 컸는지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새삼'이란 부사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한 것들을 낯설게 '새삼스럽게' 바라보기. 그 속에서 감사함과 신비로움을 느끼기.

내가 띄어 쓰기수업에서 얻은 뜻하지 않았던 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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