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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Dec 13. 2020

토르와 함께 영웅되기

눈 오는 일요일 느긋한 오전

밖에 눈 오는 풍경을 구경하면서 리모컨을 돌리다가 '토르: 나그라노크'에 멈췄다.

작년에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아들하고 같이 보았다. 아이언맨이 죽을 때 눈물까지 흘리던 아들은 영화 곳곳에 숨어있는 장면들이 어떤 뜻을 갖고 있는지 돌아오는 길 내내 열변을 토했다. 나는 마블 영화를 잘 보지 않았어서 그냥 재미있는 영화구나 했는데, 그 이후 며칠 동안 아들에게 그 장면은 어떤 영화에서 나오는 것과 연결되고, 아이언맨과 누구는 사이가 안 좋고, 장례식의 저 사람은 아이언맨 몇 편의 꼬마이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나니, 전작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한동안 유튜브를 찾아보고 공부를 했었다. 벌써 그게 한참 전이라 잊어버리고 있다가 오늘 영화를 하길래 틀어놓고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보지 않아서 상황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가 본 장면에서 토르는 어떤 성에 헐크하고 갇혀 있었고, 도와달라고 발키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게 닥친 문제를 피하지 않고 직시해. 그게 영웅의 길이지'

토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갑자기 내 가슴에 꽂혔다. 대조적으로 발키리는 이전의 트라우마로 상황을 피하려고 그 행성에 숨어 들어가서 지난 일을 회피하며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토르가 저 말을 내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발키리처럼 문제를 보지 않은 척 미뤄놓는다. 꿩이 자기 머리만 숨기면 다 숨는 줄 안다고 했던가. 나라고 뭐 어디 크게 다를까? 내 눈에 잠시 보이지 않으면 그 문제가 없어진 것처럼 생각하니 말이다. 아니, 그렇게 믿는 건 아니다. 다만, 그랬으면 하고 자기 자신을 잠시 속일 뿐이지. 문제가 밀어둔 방구석 어딘가에 계속 처박혀 있다는 사실 자체에 불안한 마음만 더 커질 뿐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문제는 없어지기는커녕, 방구석에서 먼지를 맞으면서 더 지저분해지고 있고, 나는 용기가 없어서 미처 꺼내보지 못하고 문제가 어떻게 더 나빠졌을지 상상면서 더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꺼내 본 문제는 생각만큼 흉측하지 않기도 하다.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문제는 종종 최악의 시나리오로 가곤 하지만, 막상 만나보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은 모습이기도 하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인 것이다.

그런 상황을 화면 안에서 토르가 내게 충고했고, 토르한 말이 내게는 조금 바뀌어서 들렸다. '문제를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사람이 영웅인 거지' 

영웅이 되는 위해서는 토르처럼 근육질의 강한 몸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폭정 밑에서 자신의 백성을 구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남들은 모르지만 나 혼자는 아는, 내가 갖고 있는 문제를 직시하면, 영웅인 거다.

간단해 보이는 이 일을 위해서 영웅에게 있는 큰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오늘 내가 미뤄놓은 문제가 뭐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일단 책상 정리를 해야겠다. 책상의 혼잡도가 내 마음을 반영한다는 생각을 언제부터 했다. 마음이 복잡하고 자꾸 미루다 보면, 매일 보는 책상도 같이 어질러진다. 하지만, 이것이 마음을 다시 정리하게 는 간단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거꾸로 책상을 정리하고 나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끼니 말이다.


그동안 미뤄놓았던 책을 손에 잡아보기로 했다.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주말에는 합법적으로 늘어져만 있기를 몇 주째, 책 한 장 못 읽을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너무 게으른 나를 너그럽게만 대하고 있었다.

영웅이 된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일들인가? 사소해 보여도 그동안 미뤄 놓았던 일들을 하나, 둘 하다 보면, 다른 일들에도 가속도가 붙지 않을까? 일단 퍼질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그동안 계속 미뤘는데 하루인들 괜찮지 않겠어? 하는 마음을 이번에는 나무라 본다.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가 되고 싶은 마음은 일도 없다.

나 자신에게나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우주를 구하는 일이나 나 자신에게 창피하지 않은 일이나 결국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작점이 같다는 점에서 말이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살펴보아야 하고, 실행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일이다.


이 영화에서 그렇게 잘난 척하던 토르가, 엔드게임에서는 술에 빠져서 집에서 폐인으로 지내며 엉엉 울던 모습을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위로가 된다. 영웅도 삐끗하는구나.

생각해 보니, 엔드게임에서는 타노스에게 지고 좌절에만 빠져있던 토르를 이번에는 발카리가 옆에서 지켜주는 거였구나. 토르는 아까 그 대사를 이번에는 스스로 되니이고는,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는 다시 영웅으로 돌아갈 수 있었나 보다.

토르가 다시 영웅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영화에서 최대의 미스터리는 그가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몸매를 회복할 수 있었느냐 하는 거였다. 갑옷이 코르셋 역할을 하는 건지, 그 갑옷을 나도 사고 싶다) 나도 오늘 발걸음을 떼어보겠다. 그동안 불어난 몸무게 때문에 발걸음이 무겁지만 말이다. 영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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